"부친께 윤동주는 문학지기이자 동지…형 룽징에 묻은뒤 일본말 안 쓰시더라"
'쎄씨봉 가수', 광복절 방송 KBS 2TV '윤동주 콘서트-별 헤는 밤' 출연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출연하는 가수 윤동주 |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 복사본, 1948년 출간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복간본…. 윤동주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72) 사무실에선 즐비한 기타 사이로 시인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띄었다.
세로쓰기로 된 윤동주 육필 원고 속 필체는 허투루 흘린 획이 드물 정도로 정갈했다.
"제 글씨체가 (윤)동주 형님을 많이 닮았어요." 윤형주가 5년간 써온 다이어리를 펼쳐 보이자 한눈에도 단아한 글씨체가 들어왔다.
1947년생으로 '쎄시봉 세대' 가수인 윤형주는 윤동주를 생전에 만날 수 없었다. 1917년 중국 북간도(지금의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돼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아버지께 윤동주는 그저 조카가 아니었어요. 룽징에선 아버지가 선생일 때 제자였고, 학교 선후배였고, 문학적인 부분에선 지기(知己)였죠. 아버지도 일본에서 체포됐다가 나와 두 분은 조국을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공감하고 나눴던 동지였죠."
인터뷰하는 가수 윤형주 |
집안에서 전해진 윤동주의 시와 삶의 궤적은 윤형주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 보니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불거진 양국의 갈등을 바라보는 심정은 남다르다.
그는 "요즘 두 나라 관계를 보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에 윤동주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며 "일본이 조금 더 사랑이 있는 민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윤형주는 광복절인 15일 오후 5시 55분 방송될 KBS 2TV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별 헤는 밤' 무대에 오른다. 윤동주의 시와 삶을 음악,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재해석한 무대로 이적, 스윗소로우, 다이나믹듀오, YB 등이 함께 한다.
최근 서초구 한빛기획 사무실에서 윤형주를 만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를 그려봤다. 그는 대화 중간중간 윤동주의 시구를 노래처럼 읊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1941년 12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찍은 윤동주의 모습 |
-- 윤동주는 펜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저항 시인으로 불린다. 집안에서 전해 들은 시인은 어떤 성품이었나.
중국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입구 |
-- 이번 KBS 특집 콘서트에 참여해 윤동주 생가와 묘소를 다녀왔다. 그곳을 찾을 때마다 어떤 감회가 있나.
▲ 1년 반에 한 번씩 다녀온다. 옌볜 지역에 홍수가 나면, 산소 잔디가 쓸릴 때가 있어 잔디를 입히러 다녀온다. 자녀와 손주들에게 선조가 살던 곳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다. 또 전주기전대학과 옌볜대가 7년간 옌볜에서 윤동주 시 낭송 대회를 해 다녀오곤 했다. 100년여년 전 태어나 살다가 묻힌 윤동주의 시를 그가 거닐던 그 땅에서 자란 아이들이 낭송하는 건 큰 감동이 있다.
-- 중국 지방정부가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소개하고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윤동주가 '재외동포' 시인으로 기술돼 논란이 됐다.
▲ 7년 전 중국 정부에서 윤동주를 인식하며 생가를 국가 예산으로 꾸며주기 시작했다. 길을 내주고 생가터를 소개했다. 조선족은 소수 민족인데, 중국 정부로 보면 중국 국민이란 것이다. 사실 윤동주가 살 때는 조선족이란 말조차 없었다. 항의했지만 중국 논리는 그 땅에서 나고 자라 세상 떠나 고향에 묻혔으니 중국 시인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원래 그 땅은 한민족이 살던 곳이니 중국의 동북공정 일환으로 본다. 재외동포란 시각 역시 있을 수 있겠지만 역사·문화적으로 전문가들이 다뤄봐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윤동주를 재외동포 시인으로 소개한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 |
-- 28년 짧은 생을 산 윤동주는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일본 유학으로 조국 땅에서 지낸 기간이 5년뿐인데도 민족의식에 눈뜬 배경은.
▲ 증조부(윤재옥)가 1880년대 말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이다. 한민족이 마을(명동촌)을 이뤘고 그곳에 캐나다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우리 선조, 특히 윤동주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가 정신적인 지도자였는데, 선교사들과 학교와 교회를 세워 그곳에 서양 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뿌리내렸다. 굉장히 깨어있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명동촌에는 순수 중국인 자녀도 유학 왔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란 대목이 있는데, 중국 한족 여자아이들 이름이다. 이후 나라가 일제강점기에 들어가자 윤동주가 민족의 역사나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됐을 것이다. 거기에 영향을 준 것이 부모님, 선각자로 살던 조상들이 아닐까.
-- 윤동주가 의사가 되라는 집안의 바람 대신 시인이 된 것처럼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지만, 음악인이 됐다는 점이 닮았다. 진학 즈음 시인의 꿈도 있었다던데.
▲ 형님은 (의대에) 안 갔고 저는 갔다. 하하. 아버지가 생전 가진 책이 2만5천권이어서 방이 도서관이었다. 문학 전집 뽑아서 보면서 '시가 참 아름답구나' 싶었다. 아버지도 일본 메이지학원 영문과를 나왔고 미국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으로 학위도 받았다. 아버지도 시인이셨기에 그런 분위기를 어린 시절부터 느꼈지만,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꿈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외할아버지가 의사여서 어머니가 그분처럼 어려운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으로 자라길 원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 전기를 갖다주시곤 했다. 그런데 전 건축학과를 가고 싶었다. 결국 의대를 택했는데 원서를 낼 때 아버지가 '동주가 다닌 곳이고 기독교 학교에 가라'셔서 연세대에 입학했다.
윤동주 시비 앞에 선 가수 윤형주 |
--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대표작 다수를 썼다. 1968년 연세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지날 때면 남다른 감정이 들었겠다.
▲ 형님이 1938년, 제가 28년 후 66학번으로 입학했다. 시비는 내가 경희대 의대로 옮겨간 해에 세워졌지만, (연세대 재학 시절) 형님이 백양로를 걸으며 '그때 무슨 시를 썼겠지'란 생각을 했다. 전 그때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중략) 라일락 꽃향기 흩날리던 날/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우리들의 이야기' 중)란 가사를 썼다. 같은 캠퍼스에서 형님은 시를 쓰고 28년이 지나 전 가요 가사를 썼다. 내 노래들에도 바람, 별, 나뭇잎 이런 가사가 등장하는데, 캠퍼스에 갈 때마다 '형님은 이 길을 거닐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같은 나뭇잎인데 형님에겐 왜 새롭게 보였을까…'란 질문을 던진다. 역시 시인의 눈과 마음, 시인이 선택한 단어는 남다르다.
-- 이번 콘서트에서 선곡한 '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1983)는 어떤 심정으로 만든 곡인가.
▲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길가에 앉아서' 등 히트곡이 많았을 때다. 아버지께 '동주 형님 시에 작곡해서 부르면, 사람들이 더 많이 알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여쭸다. 사실 '동주 형님 시가 더 알려지게 된다'는 목적보다 '제가 요즘 히트한 곡이 많으니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꺼내신 말씀은 딱 한 마디였다. "시도 노래다." 노래에 멜로디와 리듬, 하모니가 있듯이 시에도 시어의 선율, 리듬과 운율, 시어가 이루는 하모니가 있다는 의미였다. '아서라, 시 다칠라, 건들지 마라'란 얘기다. 하하. 이후 동주 형님 시에 숱한 작곡가들이 노래를 붙여 '서시'는 150명은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전 음 하나 못 붙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를 하자'였다. 유고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떠올려 '당신의 하늘은 무슨 빛이었길래/ 당신의 바람은 어디로 불었길래/ 당신의 별들은 무엇을 말했길래/ 당신의 시(詩)들이 이토록 숨을 쉬나요'란 가사를 썼다. 또 '서시'의 시구를 인용해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당신은 (중략)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당신은'이란 가사를 만들었다.
윤형주 부친 윤영춘 교수(왼쪽)와 윤동주 시인 |
-- 부친이 사촌 형인 윤동주 아버지(윤영석)와 후쿠오카 형무소에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당시 상황을 들었나.
▲ (사망 2주 전) 마지막 면회 때 말라보였다고 한다. 시신을 찾아가지 않으면 대학 해부용으로 보낸다는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갔는데 시신을 본 아버지 표현이 그랬다. 동주 형님이 '삼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아버지께 윤동주는 그저 조카가 아니었다. 룽징에선 아버지가 선생일 때 제자였고, 학교 선후배였고, 문학적인 부분에선 지기였다. 또 아버지도 당시 (사상 불온 혐의로 도쿄에서) 체포됐다가 나와 두 사람은 조국을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공감하고 나눴던 동지였다. 아버지는 동주 형님을 룽징에 묻은 뒤 일본말을 안 쓰셨다. 신앙으로 이겨내지 않으셨을까 했는데…. 그 배경에는 조카의 죽음이 있었던 것 같다.
-- 윤동주 옥사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는데. 의문의 주사를 맞고 생체실험 대상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 형무소 어느 교도관이 양심선언을 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자신들이 놓은 주사가) 바닷물을 증류한 증류수였다고. 또 윤동주 재판부 부장 판사가 아까운 청년이어서 살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부인하면 석방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안 했다는 게 일본 방송에 나왔다. '서시'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란 대목으로 해석하고 싶다. 형님이 자신의 운명을 알진 못했겠지만, 내면의 저항은 크게 소리 지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 그게 윤동주의 강한 세계가 아니었을까. 소리 없이 부드러운데 강한 것, 윤동주란 시인이 가진 파워가 아니겠나. 그의 시를 보면 격정적이지 않다. 잔잔히 흘러간다.
201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윤동주 추모행사에 전시된 윤동주 사진 |
-- 지금은 공원이 된 옛 후쿠오카 형무소 터를 다녀온 적이 있나.
▲ 형님이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걸 확인하기 싫어 수십년간 안 가다가 작년 10월에 처음 갔다. 아내와 함께 갔는데 예배드리면서 그런 고백을 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라고. 그간 일본에서 열린 윤동주 관련 행사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았다. 왜냐면 용서가 안 됐다. 우리 부모님이 윤동주가 죽은 것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내게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올해 2월 17일 릿쿄대에서 공연하면서 처음 "이제 여러분을 용서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란 윤동주의 이 한 마디 아니겠나. 그때 일본인들이 많이 울었다.
-- 윤동주의 시와 삶은 영화, 뮤지컬 등으로 조명됐고 문학상으로도 이어졌다.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는 뭘까.
▲ 자신을 우물에 비춰보는('자화상') 고뇌와 번민, 방황은 오늘날 젊은이들도 똑같이 느낀다. 자신이 미워지기도,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가련해지기도 하는 인간 가장 밑바닥의 감정들이다.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그가 고뇌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메시지를 준다.
--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양국 관계가 최악인데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심정은.
▲ 요즘 두 나라 관계를 보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에 윤동주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국교란 것도 애정,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랑의 힘으로 녹여질 수 있는 게 화해다. 조약, 협약 모두 타산적인 발톱을 숨기고 하는 건 결국 마지막에 부딪힌다. 일본이 조금 더 사랑이 있는 민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 윤동주 시가 일본 교과서에 실렸고, 일본인들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문화가 미래지향적 양국 관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 물론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럴 때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이 문화란 점이다. 경기가 나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일본에서 방탄소년단이 신바람 나게 하는 걸 보면 너무나 대견하다.
포즈 취하는 윤형주 |
-- 국제비영리단체 한국해비타트 이사장으로 국내외 열악한 주거환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 있다. 근황과 계획은.
▲ 한국해비타트가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올해도 강원도 산불피해 주민을 위해 13채 이동식 주택을 지원했다. 천안에도 젊은이들 참여로 12채를 지어 열두 가정이 입주했다. 또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에 가서도 집을 지었다. 쎄시봉 활동은 다들 노래를 생생하게 하니 기회가 되면 할 것이다.
-- 쎄시봉이란 통기타 문화를 만들어낸 지난 50여년 간 음악 활동을 돌아보면.
▲ 중1 때 영어를 배우면서 고교 졸업 때까지 200곡이 넘는 팝송을 줄줄 외웠고, 대학에 들어가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사주신 기타로 교본을 사서 독학했다. 그때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이 교회 고등부 성가대 선배로 후배들 앞에서 근사하게 노래하던 조영남 형이었다. 이후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송창식, 이장희를 만나면서 통기타 문화가 형성됐다. 문화는 사람들의 만남에서 이뤄진다. 우린 쎄시봉에서 만나 50년 넘는 우정으로 이어졌다. 누구를 만났느냐 어떤 사람이 모였느냐에 따라서 한 시대 문화가 만들어진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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