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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마이웨이' 성악가 김동규, 인생의 어려움에서 찾은 기회..."가능하면 계속 변화할 것"[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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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POP=이현진 기자]

헤럴드경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방송화면 캡처


김동규가 성악가로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23일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는 성악가 김동규가 출연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김동규는 연세대 88년 중앙음악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한국 성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김동규는 이탈리아 베르디 국립 음악원에 수석 입학하고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김동규는 "유럽 메이저 무대에 데뷔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저는 전날 누가 아프다고 하는 거다. 내일 '일 트로바토레' 할 수 있냐고 매니저가 물었다. 그래서 해봤다고 그랬다. 사실 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오페라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다. 누가 시킬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서 외우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동규는 "그 분들은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다. 왜 쟤가 주인공을 해야 해? 가수가 그렇게 없어? 한다. 그런데 노래를 들어보면 '오'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똑같으면 저를 안 쓴다. 그 어떤 바리톤보다 무대 위에서 휘어잡을 자신감이 있었다"고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혔다.

김동규는 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유명하다. 김동규는 이 곡에 대해 "10월만 되면 뭔가 상징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고유명사가 됐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저는 복이 많은 사람 같다.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동규는 이 노래가 발매될 1999년이 가장 힘들었다고.

김동규는 "사실은 이혼하고 이 노래 제작에 들어갔다. 제가 봄에 이혼을 했다. 그 봄이 참 힘들었다. 너무 힘들고 누구에나 그렇겠다. 저도 아이 엄마도 똑같았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게 너무 힘들었는데 여름쯤이었다.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 국장님께 전화가 왔다. 음반 제작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 'You raise me up' 작곡가에게서 한국 노래 몇 곡을 제작하면 안되겠냐 하니까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정말 작은 방에서 제가 3일동안 계속 있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노래가 이 노래다"고 전했다.

김동규는 "제가 그 전에는 매일 오페라만 하지 않았냐. 1년에 11달을 나가 살았다. 서양에서 음악하면서 전 세계를 다니는 것이 내꿈이었고, 그 꿈을 이뤘다. 그런데 크게 행복하지 않더라. 막상 목적지에 도달하니 내가 원하는게 이게 맞나 싶었다. 그렇게 평생 살다가 어려운 시절에 6개월동안 노래를 못했다. 그러다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까 하다가 만든 노래가 그 곡이다. 나는 음악 덕분에 행복했고 음악 덕분에 고생스러웠다. 마지막엔 음악이 많이 위로해줬다"고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밝혔다.

인생 최고의 전성기 시절, 안정을 위해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해 안타깝다고. 김동규는 "제가 굉장히 캐릭터가 강했나 보다. 그래서 아마 부딪친 것이 많았다. 애정이 있으면 버텼을 텐데 그러지 못했고. 결혼생활을 하는 것보다 헤어지는게 나아지는게 낫지 않을까 해서 선택했다"고 이혼 이유를 솔직히 고백했다. 김동규의 아머니는 "유럽에서는 다 주고 와야 한다. 그래서 빈 손으로 가방만 들고 돌아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동규는 "내가 자식하고 헤어진게 아니지 않냐. 그런데 자식하고 헤어여쟈 한다. 어린아이는 엄마 손에 자라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마 엄마 손에서 잘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그리움도 전했다.

김동규는 "처음에 제가 1988년도에 콩쿠르 1등 나가서 병역 혜택도 받았다. 그 때는 예술 특기생이라고 법이 있었다. 그렇게 병역 혜택도 받고 빨리 성장해서 외국으로 가서 세 스칼라 극장에도 가서 붙었다. 카레라스, 도밍고, 파바로티가 드나들던 문으로 25살 때 드나들었다"고 과거 유럽 진출 당시를 회상했다. 김동규의 어머니는 "정말 집없이 살았다. 셋 방에서 애 셋을 낳았다.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돌잔치도 백일 잔치도 안 했다. 형이 입었던 옷을 입고 사진만 찍었다. 돌잔치를 못해줬다. 동규는 아버지 덕을 하나도 못 받은 애다. 그래서 유치원도 못 보냈다"고 말했다.

김동규는 "어떻게 하면 내 노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까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해설이다"고 전했다. 김동규는 "저 이전에는 그렇게 하는 법이 없었다. 사회자가 없었다. 무슨 클래식 공연에 사회자가 있냐. 그런데 문제가 그것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다. 클래식 음악회의 격을 떨어트린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끊임없이 사람의 관심도를 주시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동규는 장르에도 다양한 장르를 클래식 공연에 재즈를 도입한 것도 그 이유라고. 김동규는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이 안된다. 사람들 생각이 다르고 달라진다. 변화무쌍한 곳에 살면서 내가 가진 노래만으로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제 자신이 만족이 안된다. 가능하면 변화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동규는 "나에게 마이웨이란 관객인 것 같다. 내가 이걸하면 저사람은 어떻게 할까 그게 늘 꿈이었다. 그게 내 욕심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박수받고 싶었다. 그게 인생이 돼버렸고 길이 돼버렸다"고 전하며 아직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성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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