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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서프라이즈' 윌리엄 스테드, 헤이그특사의 숨은 공로자‥결국 타이타닉호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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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POP=박서현기자]

헤럴드경제

방송화면 캡처


헤이그 특사의 숨은 공로자인 윌리엄 스테드 이야기가 알려졌다.

23일 방송된 MBC 프로그램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서는 헤이그 특사 사건 뒤 숨은 공로자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졌다.

내용은 이랬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나라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44개국 대표들 앞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특사는 평리원 검사였던 이준, 의정부 참찬을 역입한 이성설, 이위종. 1907년 6월 25일 무려 두 달이 넘는 여정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세사람은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초대를 받았음에도 초청장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한다. 이에 당시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등 각국 대표들을 직접 찾아가보지만 그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헤이그 특사가 회의에 참여할 수 없도록 미리 손을 썼던 것. 그러나 얼마 후 뜻밖에도 헤이그 특사들은 150명 이상 각국의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됐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푸른 눈의 흰 턱수염을 가진 한 외국인 덕분이었다. 윌리엄 스테드라는 영국 기자로 아동 매춘의 실태를 기사화해 관련 법 개정을 불러오는 등 화제의 기사들을 보도해온 저명한 언론인이었다.

특히 유럽 최초로 인터뷰 방식을 도입했고 19세기 저널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됐을 뿐 아니라 1901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던 그는 '평화회의보' 편집장으로 헤이그에 와 있었다. 그러다 우리의 헤이그 특사를 보게 됐고, 인터뷰를 제안한 것. 그는 진지하게 헤이그 특사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어린 청년들의 애국심에 깊은 감동을 받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윌리엄 스테드는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평화회의보' 6월 30일자에 헤이그 특사가 작성한 성명서 전문을 게재했으며, 7월 5일자에는 이위종과의 인터뷰를 기사화에 실었다.

급기야 150명 이상의 각국의 기자들 앞에서 연설의 기회를 주기까지 했다. 한 영국 기자의 도움으로 전 세계 언론인 앞에서 일본의 만행을 알린 우리 특사들. 이를 계기로 헤이그 특사를 대하는 언론인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졌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언론인들의 성명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무엇보다 이위종의 연설부분과 온론들의 성명서가 보도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 여론이 조금씩 바뀌게 됐다.

하지만 그 후 1907년 9월 6일 이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국 정치인을 만나는데 실패하면서 그 이상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렸다는 것에서 헤이그 특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게 됐다.

1912년 그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에 몸을 실는데 공공교롭게도 그가 탄 배는 타이타닉 호였다. 그는 일등석 승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배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popnew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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