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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언론사주' 노회찬 "우리 회사에 정리해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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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우 <한겨레> 기자]
1.

- 공직자 재산등록(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셨을 텐데 얼마나 됩니까?

"부채가 한 3000만 원쯤 됩니다."

- 집은 어떻습니까?

"인천에 17평짜리 주공 아파트가 있습니다. 그거 전세 놓고 돈 조금 빌려서 현재 집에 전세 살고 있습니다. 인천 집은 계속 팔려고 했는데 재산 가치가 별로 없는지 사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해는 제가 신용 불량자가 되어 그게 차압이 되는 바람에 못 팔았습니다."

- 신용카드를 쓰는지, 한달 결제액은 얼마인지 물어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마치 수사하는 것 같아 저도 민망합니다

"아니요, 감출 건 없고요. 제가 가진 다섯 개의 카드가 모두 정지가 됐는데, <매일노동뉴스> 경영 부진으로 돌려막기 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다소 적자였는데 국제통화기금(IMF)관리 이후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공직 후보가 되면서 신용 불량자 상태에서 나서는 건 제가 볼 때도 염치없는 짓이어서, 개인적으로 쓴 돈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서 올해 1월까지 그 신용카드 빚은 다 갚았는데, 이게 전과처럼 흔적이 남더라고요. 국회 내 농협이 있는데, 거기서 찾아와서 국회의원이니까 제일 좋은 카드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니, 며칠 뒤 갑자기 안 될 것 같다는 거예요. 국회에서 월급이 나오고 신분이 확실하지 않느냐고 했는데도 은행연합회가 정한 규정에 따라 안 된다는 겁니다. 현재 신용 불량 상태가 풀린 것은 한 은행 카드뿐이어서 그걸 가지고 쓰는데 한달 결제액이 4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2004년 노회찬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그해 말 출간된 <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랜던하우스코리아 펴냄)에서 정운영(작고.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노회찬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이 대화를 보면 노회찬은 한때 카드 5개로 빚을 돌려막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원인은 "<매일노동뉴스>의 경영 부진"이었다.

<매일노동뉴스>(이하 <매노>)는 1993년 국내 최초의 노동전문 일간지(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로 창간돼 현재까지 국내 유일의 노동전문 일간지로 발행되고 있다. 지난 12월 1일 '지령 7000호'를 발행했다. 노회찬이 이끌었던 진보정당추진위(이하 '진정추') 산하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가 노동운동진영을 포함해 노동계 전반의 주요 뉴스와 동정을 모아 팩스와 PC통신으로 배급하는 정보지로 출발해 1993년 5월 18일부터 신문 발행을 시작했다.

당시 진정추 조직위원장으로서 <매노> 초대 발행인을 맡았던 노회찬은 2003년까지 10년간 대표 경영을 맡았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되면서 당 쪽으로 일 중심이 옮아가고, <매노>의 경영 상태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매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경영을 할 수 있는 제3자(현 박승흡 <매노> 회장)에게 회사를 넘겼다. 당시 회사는 노회찬의 개인회사 형태였기 때문에 회사 부채와 직원 임금, 퇴직금 등을 해결하느라 많은 빚을 떠안게 되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수년간 빚에 눌려 살았지만 그의 생애 어디에도 <매노>에 대한 원망이나 후회를 남긴 흔적이 없다. 오히려 <매노>는 그의 긍지이자 자랑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은 노회찬이 가장 아낀 주요 이력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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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8일 <매일노동뉴스> 스무 번째 생일맞이, 전·현직 임직원 방담회(노회찬재단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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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음식천국 노회찬' 열아홉 번째 이야기는 노동운동가 노회찬에게 유일하게 '사용자'의 자리를 부여했던 <매노>에 얽힌 일화들이다. 장소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부근 <불이아(弗二我)>. 둘도 없는 우리라는 뜻의 옥호를 지닌 중국요리 훠궈전문 식당이다. 노회찬이 없는 살림에 벼르고 벼르다가 마침 "배가 들어온 날"이면, 고생한 직원들과 도움을 준 지인들을 불러 대접한 곳이다. 지금도 조금 그렇지만 당시에는 꽤 비싼 식당이었으니, 초창기 고참 직원이었던 분들 정도만 특별했던 노회찬의 <불이아> 만찬을 기억하고 있다.

훠궈는 화과(火鍋), 즉 '불솥'이라는 말로 펄펄 끓는 돼지고기 육수에 고기와 야채를 살짝 데쳐 먹는 중국식 샤부샤부 요리를 통칭한다. 고대 전국시대부터 먹었다는 본토 기원설이 있지만, 현재의 훠궈 요리는 몽골 전래설이 유력하다. 원나라 때 중국 북방에 조리법이 전해진 뒤 점차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그 가운데 쓰촨성 충칭의 훠궈 요리가 매운 훠궈 맛을 대표한다.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요리가 더운 남방으로 가서는 한여름에 땀을 빼는 이열치열식 음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 맵기만 하면 먹기 힘드니까 담백한 국물에 고기를 데치는 백탕을 추가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반은 매운 홍탕, 반은 안 매운 백탕으로 나뉜 태극솥(음양솥, 원앙솥 등으로도 부를 수 있다) 훠궈 요리가 탄생했다. 쇠고기, 양고기, 해물, 각종 야채 등 100여 가지가 넘는 재료를 수십 가지의 다양한 소스에 찍어 먹는다. <불이아>에서는 게, 새우, 낙지, 전복 등 각종 해산물도 나오며 소스는 8가지 안팎으로 취향에 따라 고르거나 섞어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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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아> 훠궈.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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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문을 연 <불이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훠궈전문점을 자부한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충칭 등 중국 쓰촨 지방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창업자 윤성준(62) 사장은 현지에서 경험한 쓰촨식 훠궈가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 입맛에도 잘 맞을 것으로 본 것이 적중해 대박을 터뜨렸다. 현재 <불이아>는 홍대 본점을 비롯해 전국에 8개의 지점을 거느리고 있는 대형 요식업체로 발전해 있다.

노회찬은 <불이아> 초창기부터 1년에 한두 번 정도 회식 장소로 애용했다고, <불이아> 직원들은 기억하고 있다.

<매노> 시절 노회찬과 동고동락했던 직원 몇 분을 초대해 모처럼 <불이아> 훠궈를 대접하고 옛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매노> 창립 후 노회찬과 함께 경영 쪽을 책임졌던 남재현 당시 경영기획실장(현재 CJ대한통운 상무), 기업으로 떠난 남 씨의 바통을 넘겨받은 이경록(현재 참치집 운영) 후임 경영기획실장과 편집국 쪽에서는 박영삼 편집부장(현재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소속), 진숙경 기자(현재 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정하연 기자(현재 편집 프리랜서) 등이 나와 주셨다. 노회찬재단에서는 조돈문 이사장과 김형탁 사무총장, 박규님 운영실장이 자리를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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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김경래.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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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회찬이 진정추 활동을 시작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어 2004년 국회의원이 되기 1년 전까지 노회찬이 지닌 대표 명함이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이었다. 이 직함은 진보정당추진세력 안에서도 계파적 기반이 약했던 노회찬에게 '영향력 있는 신문 발행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노동부 등 관계나 경총 등 재계 쪽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진보정치인 노회찬에게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신분'을 얻는 대가도 적지 않았다. 거의 전 기간에 걸친 경영난과 그로부터 파생된 인간적 갈등이었다. 노회찬에게 <매노>에서의 10년은 신문을 만드는 재미에 흠뻑 빠진 '유쾌한 노회찬'과 월급줄 날이 다가오면 직원들 몰래 여기저기 친구와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꾸어야 했던 '괴로운 노회찬'의 동행이었다.

"당시 인쇄 품질을 높이려는 시설 자금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데 투자할 돈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부인 김지선 선생과 서울역 앞에서 만나 김 선생 명의의 인천 주공아파트를 담보로 신용보증기금에서 2000만 원을 빌렸던 일도 있었습니다. 돈을 하도 많이 빌려 노 대표 이름으로는 더 이상 대출을 받을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마지막 몇 년 동안 한 달 운영비에서 꼭 1000만 원 안팎 정도가 모자랐습니다. 차라리 왕창 모자라면 다른 대책을 강구할 텐데 딱 그만큼이니, 그때마다 돈을 구하러 다녀야 했던 것이죠. 제가 알기로는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친구분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애환이 서려 있는 <매노>와 노회찬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90년대 초반의 한국 언론은 <한겨레>를 제외하면 노동계 소식, 특히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없고 잘 모르기도 했고요. 그러니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진영의 소식을 모은 정보지는 희귀하고 유용한 정보원이었습니다. 우리가 노동계 소식을 모아서 배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CIA 한국지부에서 마틴이란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자기들에게도 노동계 소식을 제공해 줄 수 없느냐는 거였죠. 마틴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은 삼성 정보원. 역시 삼성도 정확하고 신속한 노동계 정보를 원하고 있었죠. 그다음이 안기부, 경찰 등 국내 정보기관들이 줄지어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노동 정보의 뉴스 가능성을 알아본 당시 진정추 김태균(현재 노사발전재단 HR컨설팅팀 부장) 노동국장이 일간지 발행을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처음엔 진정추 안에서도 반대 여론이 높았다고 합니다. 일간지 발행에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노 대표님은 달랐어요. 감옥에서부터 진보정당 창당 과정을 면밀히 구상해온 노 대표는 진보정당 창당 전 단계에서는 장차 당의 기반이 되어줄 노동계 전반을 아우르는 매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죠. 다만 진정추의 능력으로 일간 발행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가 문제였을 겁니다."
노회찬은 한 인쇄소 사장을 통해 낮은 인쇄 품질을 감수한다면 저비용으로 신문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간지 발행을 강행했다. '우리에겐 무보수로 일해줄 열성적이고 지적인 조직원들이 있지 않은가.' 저비용 인쇄소에 신문을 찍어 고속버스를 이용해 각 지역 진정추 지부로 수송한 뒤 진정추 회원들이 배달을 하면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헌신이 없으면 세울 수 없는 계획이었다. 조승수 전 의원도 <매노>를 배달했던 지국장의 한 명이었다.

"배달 부수가 늘면서 고속버스 이용에도 한계가 보이자, 전국의 <한겨레> 지국을 찾아다니며 배달을 부탁한 끝에 97년부터는 한겨레 배달망을 타고 <매노>를 배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 그래도 매일매일 신문을 발행하려면 많은 돈이 들 텐데 참 힘들었겠습니다.

"노 대표님은 경영의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하고 시작했죠. 돈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제호에 '매일'을 넣은 것도 노 대표였습니다. 나중에 경영이 어려워져도 신문만큼은 매일 나올 수 있도록 하자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종사자들은 기본적으로 무보수 자원봉사였습니다. 모두들 노동운동하는 자세로 임했으니 보수를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러나 영업은 해야 했으니까 돌아다닐 차비는 있어야 하잖아요? 외근하는 친구들에게 1인당 하루 버스표 4장을 지급한 게 최초의 보수였습니다. 저와 노 대표는 10장짜리 버스회수권을 11장이 나오게 자르는 것이 경영이었구요(웃음)."

- 공채 기자도 채용했는데 월급을 안 주고선 곤란했을 텐데요

"보수를 아주 안 줄 수는 없어서 노 대표와 상의해 월급을 20만 원으로 책정했는데, 첫 달을 주고 한 6개월가량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영이 조금씩 나아지고 공채 기자를 뽑으면서 5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100만 원 이상 월급을 받은 사람은 나중에 '스카우트'로 합류한 극소수의 '전문 인력' 정도였을 겁니다."

- 그래서 노동조합이 생긴 겁니까?

"제가 초대 지부장이었는데 임금이나 노동 조건 때문에 노조를 만든 건 아니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젊은 기자들은 운동 이전에 기자를 하려고 온 분들이니까 마인드도 조금 달랐구요. 직원들 간에 유대도 강화하고 다른 신문사 기자들처럼 언론노련에 가입하려면 자체 노조도 있어야 했던 게 노조 결성의 주된 이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노 의원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매노>에는 노사가 따로 없으니 노조는 없어도 되는 걸로 하자고 했습니다. <매노>는 진보노동운동의 일환으로 기능해야지 노사관계로 움직이는 조직이어선 안 된다는 게 대표님의 지론이었습니다. 나중에 노조 출범식에 오셔서 이런 축사를 했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사용자가 되는 계획은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저를 사용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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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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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노회찬과 '노동자' 직원들 사이는 일반적인 노사와 달리 화기애애했다. 늘 좋은 말만 오간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노사가 따로 없는 회사 분위기였다고 한다.

"노조 출범 직후 단체교섭에 들어갔는데 당시 노동계의 핫이슈가 정리해고 반대였습니다. 민주노총이 전 단위 노조에 정리해고 대응안을 단체협상에서 관철하라는 지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노 대표님이 '<매노>엔 정리해고란 있을 수 없다. 정리해고를 하느니 차라리 문을 닫겠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단협 첫 머리가 '우리 회사에서는 정리해고가 없다'가 되었습니다."

"취재 나가면 노조 분들이 '<매노> 노조는 어용이라며?'라고 놀리곤 하셨죠. 저희들은 '아니요. 우리가 어용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용이에요.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징계받게 해야 돼요'라고 받아주었고요."

- 정말 노사 갈등이 한 번도 없었나?

"직원들이 노 대표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만, 회사 일에 관해서는 따지고 싶은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없다면 거짓말이죠. 예컨대 노 대표가 어떤 일을 벌이고 나면 그에 대한 이견이 나올 수 있고, 반발도 할 수 있는 거고."

- 좋았던 시간도 물론 많았겠지요? 가장 기억나는 <매노>의 좋은 시절이라면?

"제 기억으로 90년대 후반에 한해 흑자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구독자가 늘어나며 경영도 눈에 띄게 호전되었는데, 주된 이유는 양대 노총 총파업 등 대형 노동계 현안이 줄을 이으면서 노동계 전반의 소식을 아우르는 신문으로서 높아진 <매노>의 영향력이었습니다."

"<매노>가 사용자 쪽에게까지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당시 진념 노동부 장관의 덕담 덕을 많이 봤습니다. 재정부 관료 출신의 진념 씨는 화통한 성격으로 노동계 쪽과도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취임 후 <매노>와 인터뷰를 하면서 "매일 아침 청사에 출근해 맨 먼저 하는 일이 <매일노동뉴스>를 보는 것"이란 멘트를 날려줬지요.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전국의 노동부 산하 지청과 사무소에서 구독 신청이 쇄도하고 기업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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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노동뉴스> 지령 1000호 기념식. ⓒ노회찬재단



당시 달라진 <매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1996년 4월 '지령 1000호' 기념식 장면이다. 이날 기념식장에는 진념 노동부 장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 경총 조남홍 부회장을 비롯해 장을병 민주당 공동 대표,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 등 노사정 대표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당시 노사정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 기념식이 처음이어서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이 장면을 찍으려고 대거 몰려들어 취재 경쟁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창립 3주년밖에 안 된 노동전문지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언젠가 삼성에서 돈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무슨 기사 때문이었는데 그 기사를 빼주면 주겠다는 겁니다. 노 의원에게 보고했더니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지요. <매노> 기사의 위력이 그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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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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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회찬에게 일하는 재미를 안겨주었던 <매노>는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8년부터 본격화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파고에 휩쓸리며 급격히 경영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노회찬은 여러 가지 신사업을 시도해보지만 성과를 보기에는 자금이나 시간이 모두 부족했다. 투자 자본을 모으려던 주식회사 전환 작업도 수포가 되면서 노회찬과 <매노>의 '사랑'은 점차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 노 의원이 <매노>를 접은 것이 2003년입니다

"당시 노 대표가 민노당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아무래도 일 중심이 당으로 쏠리기도 했지만, 역시 악화된 경영상태가 문제였습니다. 인터넷방송이나 디지털사업 쪽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시도도 하셨지만, 자금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앞서간 면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흑자 기조를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면서 점진적으로 사업을 넓혀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99년인가요? 주식회사 전환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노 대표님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 무렵 <매노>는 만성적인 자금난을 해소하고 투자 여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논의했다. 창립 사원들은 사원지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지분 분배를 원했으나, 노회찬은 <매노>가 진보노동운동의 대의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초창기 <매노> 설립을 지원한 진정추 회원들에게 일정 지분을 배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정추 지분 30%를 합쳐 51%의 지분으로 노회찬이 경영권을 대표하는 안을 제안해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주식회사 전환을 의결하는 총회장에서 일부 사원이 '노회찬 안'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총회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주식회사 전환을 전제로 한 진정추 지분 문제는 <매노> 창간 초부터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부 사원들의 의문을 이해하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51%' 안에 동의했습니다. 경영권이 취약하면 <매노>의 정체성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이 돈 가방을 들고 왔을 때 과연 과거와 같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 혹시 이사회나 임원이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우려가 결코 기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투자 재원을 확보하려는 주식회사 계획은 수포가 되고 그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이 불씨가 되어 창립 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온 주요 직원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면서 노회찬도 큰 상처를 받았다.

"총회장을 박차고 나간 뒤 두 달 정도 회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뢰 관계에 대한 충격이 컸던 거죠."

"그 이후 회사 경영은 여러 가지 신사업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노 대표가 민노당 사무총장이 되자 직원들 사이에서 당무와 회사 경영 중 하나만을 선택해 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습니다. 그즈음에 제가 <매노>의 양도를 노 대표에게 건의하게 되었습니다."
노회찬은 결국 당시 비정규직센터를 운영하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 교사 출신의 박승흡 대표에게 <매노>를 넘기는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 "노회찬이 떠나면서 <매노>의 한 시대도 끝났다"고 어느 분이 말씀하셨는데, 끝으로 그 시절 노회찬에 대한 인상이나 평가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결과론이지만 회사 경영자는 노 대표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운동가로서 <매노>를 만든 목적에는 충실했으나, 회사를 안정되게 운영해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니까요."

"저 역시 사업가보다는 운동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에게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면 경영자로서도 성공했을 것 같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 미래를 생각하는 사업 전망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어요."

"일부에서는 노 대표가 자신의 정치를 위해 <매노>를 이용했다는 식으로 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매노>가 그의 정치 이력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매노>를 자기 정치에 유리하게끔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제가 본 노회찬은 다른 사람에 비해 바라보는 지평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매노> 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사사롭게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가 같이 일해보자고 손을 내밀 때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제게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

"노 대표님은 당에서보다 <매노>에서 더 행복해했습니다. 특히 젊은 기자들과 어울 때 보면 더 그랬고요. 공과를 떠나 노 대표는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매노>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정추 시절부터 '노회찬 대망론'을 가졌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씨 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슴에 많은 것을 심어주셨죠. 지금 저희 회사는 택배 직원까지 합해 5~6만 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그 직원들이 모두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서 어느 날씨 좋은 날 광장 같은데 모여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어보자는 꿈이 있는데, 노 대표가 제게 심어준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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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노>를 떠난 뒤에도 노회찬은 기회가 있을 때면 옛 시절 동지뿐 아니라 현재의 임직원들과도 교류하며 <매노>의 앞날을 성원했다.

"초창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매일노동뉴스를 이끈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매일노동뉴스도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몸만 떠났을 뿐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매일노동뉴스가 더 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집니다. 나도 있는 힘, 없는 힘 다해서 돕겠습니다."(2012년 5월 18일 <매일노동뉴스> 전·현직 임직원 방담회에서)
노회찬이 생전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자격은 2003년 9월 말로 종료됐다. 이후 파란만장의 정치역정을 거치며 세 차례 국회의원 배지도 달았지만, <매노>와 함께했던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무명의 젊은 진보정치가에게 외투가 되어주고 디딤돌이 되어준 연인이며, 무보수의 직원들과 더불어 뜨거운 열정을 나눈 동지였기에 노회찬도 <매노>도 서로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회찬 영결식이 거행된 2018년 7월 27일 매일노동뉴스 임직원들은 <매노> 지면에 추모 광고를 내고 고인을 애도했다.

"'매일노동뉴스를 만든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던, '10년간 매일노동뉴스를 경영하며 마신 소주가 3천병, 맥주는 1만병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다'던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초대 대표. 당신의 노고, 의지, 꿈 잊지 않겠습니다. 매일노동뉴스 임직원 일동."(☞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18년 7월 30일 자 '[매일노동뉴스 초대 발행인 노회찬을 떠나보내며] 나무에서 숲이 되기까지 함께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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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우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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