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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신태용호'에 절실한 '비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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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큰 일을 앞두고 꼬리를 문 악재가 터지면 눈앞이 아득해질 것이다. 시련을 안긴 하늘도 원망해 보고 복없는 팔자 탓도 해보겠지만 결국은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하는 ‘신태용호’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 대회를 앞두고 김민재, 권창훈, 염기훈, 이근호 등 전력의 핵심선수들이 거짓말처럼 줄부상으로 쓰러져 전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특히 올시즌 프랑스리그에서 11골을 터뜨리며 만개한 권창훈이 시즌 최종전에서 아킬레스건을 다쳐 월드컵에 승선하지 못한 건 ‘신태용호’의 박복한 운명에 정점을 찍는 일대 사건으로 기억될 만했다. 러시아월드컵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떨어지고 월드컵 열기마저 식어버린 것도 바로 경기력 저하와 직결된 주축선수들의 줄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넋 놓고 포기할 수는 없다. 대표팀을 이끄는 신태용 감독이 남은 기간 어떤 마음가짐과 리더십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갑작스레 밀어닥친 악재와 예기치 않은 환경만 탓하는 건 나약한 자의 변명에 다름 아니다. 바닥 끝까지 추락한 지금의 상황에선 성공을 장담하기는 힘들겠지만 전략적 사고를 통해 실패의 정도를 최소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신태용호’에 필요한 몇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B플랜조차 꾸리기 힘든 처참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비움의 철학’이다. 상황이 힘들어지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똬리를 틀 게 돼있다. 많은 생각은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은 자신의 경기력조차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경우 불안감을 키우는 많은 생각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오히려 곁가지와 군더더기로 기능하기 쉽다. 힘든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가지 생각을 조합하는 건 지금에는 별로 의미가 없을 듯하다. 본질을 관통하기 위해선 더하고 보태기 보다는 오히려 비우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지적을 귀담아둘 만하다.

냉정한 자기 자신의 객관화도 급한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한국(FIFA 랭킹 61위)이 속한 F조에서 디펜딩챔피언 독일(1위), 북중미의 맹주 멕시코(15위), 북유럽 축구의 강호 스웨덴(23위) 등은 누가 뭐래도 한국보다 한 수 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언더 독(under dog)’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린 늘 그랬다. 그렇게 생긴 마음의 여유에 믿음, 자신감,투쟁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라는 신비한 묘약을 채워넣었으면 좋겠다. 경기력의 물리적 총합을 뛰어넘는 열쇠인 시너지 효과는 선수단의 화학적 결합에서 비롯되며 여기서 뿜어지는 에너지는 때론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같은 힘을 발휘한다.

조심스럽지만 ‘신태용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당부는 수비 라인에 관한 것이다. 신 감독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수비라인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지도자다. 포백과 스리백을 탄력적으로 구사하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게 최근 평가전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의 상황에선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나마 익숙한 것을 선택해 실패를 최소화하는데 포커스를 맞추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K리거가 주축인 수비라인에서 스리백은 아무래도 낯선 전술이다. 수비수들끼리의 유기적인 플레이가 뒷받침돼야 하는 스리백은 전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의 수비전술로 포백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다. “시간의 덫에 걸린 실험은 무의미한 도박일 뿐”이라는 지적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복잡할수록 단순해지라고 했다. 최근 다시 각광받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를 과감하세 제거하고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의 한 흐름이다. 월드컵이라는 대사를 앞두고 벼랑 끝에 내몰린 ‘신태용호’도 ‘비움의 철학’을 바탕으로 녹색 그라운드에서 미니멀리즘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기적이라는 허황한 꿈을 꾸기보다는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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