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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28년째 3000경기… 펜으로 야구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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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KBO 경기기록위원, 최초 3000경기 출장 대기록

전국 야구장 돌아다니며 그라운드 모든 순간 담아 "경기 없는 월요일만 쉬죠"

조선일보

이종훈 KBO 기록위원이 잠실야구장에서 28년째 함께한 야구 기록지와 야구공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진한 기자


야구 기록지엔 가로 1.3㎝, 세로 1.2㎝ 바둑판 한 칸 크기마다 그날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일이 모두 담긴다. 안타와 홈런, 삼진과 볼넷부터 타구가 흘러간 방향, 주자의 이동, 선수나 감독의 퇴장까지 한 경기의 흐름이 그 안에 다 있다. 이종훈(54) KBO 기록위원은 28년째 야구장을 지키며, 지난 12일 KBO 최초 3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 위원을 잠실야구장 홈 플레이트 뒷그물 쪽에 있는 기록위원실에서 최근 만났다. 그의 데뷔전은 1992년 8월 30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태평양 돌핀스의 경기. 그날 삼성 1번 타자가 류중일 현 LG 감독이었고 태평양에선 2번 타자로 염경엽 현 SK 감독을 내보냈다. 현역 지도자나 해설위원으로 낯익은 이름들이 그의 기록지에선 유니폼을 입었다.

"예전엔 선수들 한자(漢字) 이름 외우는 게 일이었어요. 기록지는 1990년대 말부터 컴퓨터에 병기했고요." 그는 "야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다"고 멋쩍게 웃었다.

이 위원의 일상은 전국 야구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기 3시간 전 출근, 야구 끝나면 퇴근, 경기 없는 월요일만 쉬는 생활의 반복이다. KBO 기록위원 둘씩 짝 지어 일하는데, 17명이 전국에서 1·2군 경기를 나눠 맡는 빡빡한 일정이다. 음식도 조심하고, 함부로 아프다고 말도 못 한다. 그는 "연속 경기 안타처럼 의미 있는 기록이 걸린 날엔 화장실도 못 간다"고 했다.

"가령 모호한 땅볼 타구를 내야 안타로 하느냐, 야수 실책으로 하느냐에 따라 타자와 투수의 희비가 엇갈려요. 시빗거리를 없애려면 눈 치켜뜨고 봐야 합니다." 야구의 사관(史官)인 까닭에 특별히 친한 선수나 코치도, 응원하는 팀도 없다고 했다. MBC청룡이 그의 마지막 응원팀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론 김동주가 잠실구장 최초 장외 홈런을 쳤던 2000년 5월 두산-롯데전을 꼽았다. "외야 관중석 어디에 타구가 맞느냐에 따라 비거리를 미리 정해 놓는데 그렇게 멀리 날아간 타구는 처음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150m'를 적어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아직 KBO 1군엔 없는 퍼펙트게임을 직접 기록지에 적어 보는 게 그의 꿈이다. "작년 4월 최원태 선수가 8회 1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할 때 담당이었는데 기록이 깨져 정말 아쉬웠어요."

야구와 인생은 9회말 2아웃부터라고들 한다. "정말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게 야구와 인생 같아요. 야구를 매일 보지만 지겨웠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위원은 24일 대구에서 3009번째 기록지를 썼다.

[양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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