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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이토록 뜨거운 ‘언니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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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2회 ‘언니들의 축구대회’ 현장…

깨지고 넘어져도 이들이 공을 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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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차보지도 못했다. 당시 운동장을 누비던 많은 남자가 자라서 조기 축구를 했다면 당시 운동장을 등지고 있던 많은 여자는 축구와 조기 이별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우연찮게, 썩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경기 규칙도 제대로 모른 채 축구를 시작한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넓은 피치(운동장)를 뛰어다니고, 공 다루는 섬세한 기술을 하나둘 익히고, 팀원끼리 호흡을 맞춰 골대를 향해 공을 착착 몰고 가는 재미에 푹 빠지며 ‘아, 사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민음사 펴냄, 김혼비 지음)

축구장을 가득 메운 ‘언니들’



“영미 언니, 올라가.” “남숙 언니, 움직여야 해.”

FC 바르셀로나의 파란색 훈련용 유니폼을 입고 골대 앞에서 수비하던 12번 선수의 발 앞으로 공이 굴러가자, 필드 밖에 있던 박해정(43) 노원여성축구단 감독의 목소리가 커졌다. “현주야, 킥 차줘.” 박 감독의 지시에 따라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김현주(44) 언니가 공격수가 있는 상대편 골문 쪽으로 인사이드킥으로 공을 밀어올렸다. 현주 언니가 찬 공은 상대 문전에 있는 20번 안남숙(51) 언니에게 닿기 전, 상대편 선수의 발에 뺏겼다. 박 감독이 아쉬운 듯 “에휴” 하고 입에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한낮 온도가 35℃로 푹푹 쪘던 7월6일 토요일 낮. 서울 송파여성축구장에선 ‘골대를 향해 공을 착착 몰고’ 가고, ‘숨이 턱에 찰 때까지 피치 위를 뛰어다니’는 여성들이 있었다. 축구장 하나를 네 개로 나눈 풋살 경기장 왼쪽 두 곳에선 ‘4060’ 언니들이, 오른쪽 두 경기장에선 ‘2030’ 언니들이 공을 몰고, 또 뺏고 있었다. 이름하여 ‘언니들의 축구대회’.

아침 9시부터 전·후반 없이 15분 단위로 경기가 치러졌지만 필드에서 뛰는 선수도, 스탠드에서 응원하는 선수도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응원석과 필드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언니’. 축구 경기장에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야외 스탠드에서 남학생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피구하는 공간밖에 허락받지 못했던 여성들은 이날 온 운동장과 응원석을 점령했다.

‘언니들의 축구대회’는 여성을 위한 스포츠 프로그램 서비스 플랫폼 회사인 위밋업스포츠에서 주최했다. 자신이 여자축구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이었던 신혜미 대표는 축구를 즐기는 중년 여성들에게 경기에 뛸 기회를 주기 위해 이번 경기를 꾸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해는 40~50대가 대상이었고 올해는 60대와 20~30대까지 대상 범위를 넓힌 것이다.

신 대표가 설명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주최하는 남성 축구 경기는 실버조, 장년조 등 나이대마다 조가 나뉘지만 여성 생활체육은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나이대와 상관없이 실력에 따라 1부, 2부 리그로 나뉠 뿐이다. 나이 든 언니들은 연습에 열심히 참여하고 축구에 대한 열정도 있지만, 실력과 체력 면에서 우세한 젊은 친구들에게 밀려 경기를 뛸 수 있는 기회가 사실상 많지 않다. 그래서 언니들을 위한 경기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여성축구 동호회 전국 115개



나이 많은 언니들을 위한 체육대회다보니 40~60대 언니들의 경기에선 ‘나이 많은 게 벼슬’이었다. 노원여자축구단은 가즈아FC와의 예선 3차전에서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지만 경기 종료 3분 전 시점에서 선수 나이 합산 ‘253살 대 264살’로 밀려 졌다. 경기 뛴 선수 중 가장 어린 44살 현주 언니는 “내가 어려서 졌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팀에서 민폐가 된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주최 쪽 배려였다. 이날 우승한 프리티우먼즈의 최고(나이 많은) 언니인 김정희(60)씨는 “젊은 친구들이랑 함께 경기를 뛰어서 좋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팀 우승에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장 바깥에서 언니들 축구대회를 지켜보는 이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다 말고 이들의 경기를 구경하던 이아무개(46)씨가 말했다. “날도 더운데 체력들이 대단하다. 중년 여성들이 뛰는 축구가 낯설다. 생각보다 박진감 있어 10분째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여성축구단은 1990년 평양여성축구팀과 친선경기를 위해 급조한 게 시작이다. 1990년대 말부터 서울시에 여성축구단이 잇따라 생기면서 현재는 성동구를 제외한 24개 자치구에서 여성축구교실이나 여성축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는 축구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구에서 낸다는 조건으로 현재 구별로 최대 1200만원가량을 어머니 축구교실 예산으로 지원한다.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축구 동호회 전체 2878개 중 여성 동호회는 115개다. 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동호회나 풋살팀까지 더하면 여성축구 동호회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축구하는 여성이 늘면서 축구협회도 2011년부터 여학생 축구교실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여학생 축구교실 사업은 16개 교실로 시작해 현재 51개까지 늘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여민지 선수 등 여성축구 선수들이 사업 시작 즈음에 두각을 나타냈고, 2010년 17살 이하(U-17)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사업을 진행했다. 아직 미흡하지만 여성축구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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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이날 경기를 뛴 노원여성축구단 선수의 평균나이는 51살이다. 노원여성축구단 21번 김미경(55) 언니는 최고령 선수다. 2004년 노원여성축구단을 창단할 때부터 함께했다. “내가 운동 좀 하게 생겼는지 지인이 추천해서 2개월 정도 고민하다가 39살에 축구를 시작했다. 그땐 서울시에 여성축구단이 도봉·송파·마포 3곳밖에 없었다.” 미경 언니는 도봉에서 축구하다가 도봉여성축구단이 해체되면서 노원으로 넘어왔다. 노원여성축구단 선수들의 직업은 전업주부, 간호사, 선생님 등 다양하다.

지인 소개로 ‘우연히’ 시작한 축구를 중심으로 미경 언니의 생활 리듬은 재편됐다. 미경 언니는 월·수·금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노원마들스타디움에서 훈련한다. 요즘에는 8월에 있을 충북도지사배 여성축구대회 출전을 준비하느라 체력 단련에 열을 올리고 있다. 허벅지 근육을 키우려고 스쿼트를 하루 30분씩 하고, 경기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매주 친선경기를 하고 있다. 경기 상대로 남성 팀도 있다.

처음에는 주변 반대도 있었다. 축구가 남성의 전유물이었을 때다. 남성들이 점유한 운동장에서 여성이 뛰는 것을 고깝게 봤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이 ‘무슨 여자가, 아줌마가 축구를 하냐’고 했다. 시간이 지나니까 쫓아다니면서 밥도 사주고 하더라. 지금은 밖에 나가면 은근슬쩍 자랑도 한다.” 미경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연습하는 축구장을 쫓아다닌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미경 언니의 큰 지지자다. 미경 언니 팀은 25살이 된 아들 친구들과 같이 경기를 하기도 한다.

나이가 가장 많아서 별명이 ‘고문님’인 미경 언니는 스스로를 ‘뒷방 늙은이’라고 했지만, 이날 경기 대부분을 공격수·수비수·골키퍼로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타박상을 입었는데도 “얼음찜질 하면 된다”며 16년 축구 짬밥에서 나오는 여유를 보였다. 같은 팀 하보성(52) 언니가 거들었다. “나는 7년 전 축구하다가 전방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됐다.” 하지만 보성 언니의 축구 열정은 아무도 못 말렸다. “친정 엄마가 축구만 그만두면 뭐든 다 해준다고 했는데, 이젠 축구하러 안 가냐고 묻는다.”

깨지고 넘어지면서도 축구를 멈출 수 없는 매력은 뭘까. “뜨거운 여름에 팀원들과 호흡을 맞추고 땀 흘려서 흠뻑 젖은 빤스(팬티)를 꽉 짤 때 정말 기분 좋다. 한겨울엔 운동장에 쌓인 눈을 쓸어가면서 운동했다.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축구다.” ‘힘들어 죽네 하면서도 필드에 들어가면 또 뛰고, 나와서 죽는’ 미경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리오넬 메시다. 메시가 드리블하면서 빠르게 수비수들을 제칠 때 환상적이다. 수비수인 미경 언니는 ‘언니 메시’들이 몰고 오는 공을 자를 때 희열을 느낀다.

축구 전도사인 미경 언니는 운동 좀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접근해 말한다. “정말 매력 있는 운동이다. 피부과 가서 깨 털면(주근깨 레이저 시술하면) 되니 피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나도 한번 털었다.(웃음)”

‘언니 축구’는 계속된다



노원여성축구단은 예선 1차전에서 0 대 2로 도봉팀에 진 데 이어, 2·3차전에서 나이 합산으로 졌다. 4차전 경기에서 보성 언니의 패스를 받아 남숙 언니가 골을 넣으며 1승을 챙겼지만 결승에는 오르지 못했다. 남숙 언니가 아쉬워했다. “도봉이랑 연습해서 진 적이 없었는데 2점 차로 진 게 속상하다. (U-20 월드컵 국가대표팀 골키퍼) 이광연 선수처럼(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막고 유니폼의 호랑이 엠블럼을 입에 물며 기뻐함) 골을 넣고 엠블럼을 (왼쪽 가슴에 있는 FC 바르셀로나 엠블럼을 잡으며) 물고 싶었는데….” 하지만 언니들은 금세 다음 경기를 기약한다. 자양강장제 음료를 나눠 마시며 박 감독이 말했다. “우리 노원이 공은 못 차도 인심은 좋아요.”

그리고 한마디. “여자가 축구하는 게 뭐요? 이상한 게 있나요?”(남숙 언니) 이상할 것 없는 언니들의 축구대회는 계속된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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