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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슈 [연재] 헤럴드경제 '골프상식 백과사전'

[골프상식 백과사전 204] 최고의 스윙어 미키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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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미키 라이트.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남화영 기자] 역사상 최고의 여자 골퍼를 꼽는다면 여러 사람이 거론될 수 있겠으나 투어에서 이룩한 성과로 봤을 때는 미키 라이트(Mickey Wright: 1935.2.14.~2020.2.17)가 최고였다.

지난 화요일 85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라이트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는 우승 82승에 메이저 13승을 거뒀다. 최다승은 생존한 캐시 위트워스로 88승이고, 메이저 최다승은 15승의 패티 버그다. 라이트는 둘 다 역대 2위다.

전성기였던 1961년부터 1964년까지 4년간 무려 44승(10-10-13-11승)을 올리는 전무후무한 승수를 쌓았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2000년 US오픈부터 이듬해 마스터스까지 메이저 4개를 휩쓸어 타이거 슬램을 만들었는데 실은 라이트가 먼저였다. 1961년 US여자오픈을 시작으로 61년 LPGA챔피언십, 62년 타이틀홀더스챔피언십. 62년 웨스턴오픈까지 4개 메이저를 연달아 우승한 유일한 선수다.

세 명의 코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난 미키 라이트는 11세에 골프를 접했다. 17세이던 1952년 USGA(미국골프협회) 여자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보였고 2년 뒤인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1학년일 때 US아마추어선수권을 우승한 뒤로는 대학 중퇴 후 이듬해 LPGA에 데뷔했다.

라이트는 175cm의 큰 키에 시원한 장타를 쳤는데 12세 때 샌디에이고 미션밸리컨트리클럽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다. 티칭 프로 프레드 셔먼은 한밤에 클럽 연습장에서 클리닉 이벤트를 열곤 했다. 야구장처럼 조명을 환하게 켠 채 행사가 무르익을 때면 라이트가 시범을 보이곤 했다. 샷을 하면 볼은 조명이 비치는 지점까지 계속 오르막을 그리다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이후 프로가 되어 장타가 필요할 때면 라이트는 ‘볼을 사라지게 만들어’라고 속삭이곤 했다. 어린 시절 사람들은 환호를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관심을 즐겼고 “최고의 골퍼는 과장된 기질, 약간의 허세가 있다”고 주장했다.

라이트의 첫 번째 스승은 캘리포니아 라호야컨트리클럽 프로인 조니 벨런트였다. 처음 레슨을 받았을 때 조니는 유칼립투스 나무 가지를 하나 꺾어서 ‘가지가 노래를 부르게 해보라’고 시켰다. 가지를 휘두르면서 큰 소리가 나게 하려면 최대한 빨리, 매끄럽지만 강하게 휘둘러야 했다. 그는 나중에 당시 코치의 레슨이 정말로 탁월했다고 술회했다. 볼을 맞히는(히팅) 게 아니라, 그걸 통과해서 스윙하는 느낌을 익힐 수 있었다. 후대에 라이트가 최고의 스윙어가 된 건 처음에 스윙의 감을 잘 익혔기 때문이었다.

라이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코치는 해리 프레슬러였다. 토요일마다 자동차로 2시간반 거리의 샌가브리엘컨트리클럽으로 가서 해리에게 30분씩 레슨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스윙은 사실상 해리가 만들어준 스윙이었다. 당시 코치의 사무실 벽에는 양쪽 허벅지에 벨트를 두르고 양쪽 팔뚝에는 밴드를 감아서 스윙을 하는 동안 양팔 거리를 일정하게 두고 연습하는 벤 호건의 스윙 사진이 있었다. 해리는 세상에 좋은 스윙은 하나라고 믿고 다음과 같은 동작 원칙을 엄수했다. ‘백스윙을 할 때 클럽은 직각으로, 스윙 톱에서는 오른손을 샤프트 밑에서 쟁반을 든 것처럼, 클럽은 45도 각도로 하고 다운스윙 중간 지점과 임팩트와 폴로스루에 갈 때도 클럽페이스는 직각으로 유지하라.’ 라이트의 스윙 리듬과 템포는 타고났지만 스윙은 호건을 본딴 해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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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라이트 64년 US여자오픈 4승째.



18년의 우승 시절

라이트는 1955년 LPGA투어에 데뷔했고 첫 우승은 2년차이던 1956년 잭슨빌오픈에서 첫승을 거뒀다. 이듬해인 1957년에 시즌 3승을 하면서 이후로 1969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않고 승수를 쌓았다. 그리고 라이트는 무엇보다도 투어 생활을 즐겼다.

투어에 처음 합류했을 때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자동차 행렬을 이루며 개최지를 찾아다녔는데 그걸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라이트의 기억에 다들 크고 편안한 캐딜락을 몰았다. 자동차가 지금보다 많지 않을 때여서 교통 정체도 없었다. 다른 대회를 향해 운전할 때면 긴장을 풀고 생각에 잠기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라디오도 많이 들었는데 주로 컨트리음악에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을 자주 틀어주는 라디오 채널을 들으며 다녔다.

라이트의 스윙은 너무나 부드러웠는데 리듬을 이용하곤 했다. 몸의 특정 부위를 과하게 쓰지 않아서 선수 생활 내내 특별한 부상이 없었다. 가장 큰 부상을 꼽자면 고작 왼쪽 손목의 신경 낭종이었다. 발목은 두 번 접질렸는데 두 번 모두 하이힐을 신고 칵테일파티에 갔을 때였다. 하지만 그건 부상으로 치지 않는다.

1958년에 LPGA챔피언십에서 첫 메이저 우승한 데 이어 US여자오픈을 포함해 5승을 싹쓸이하더니 1960년대 초반은 라이트의 이름이 모든 대회를 도배했다. 61, 62년에 10승씩, 63년 13승, 64년엔 11승을 거두었다. 1969년에는 블루그라스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한 게 연속 우승의 끝이었다. 그리고 잠시 반은퇴를 했다가 투어에 복귀한 뒤론 1973년 콜게이트 다이나쇼오위너스서클에서 우승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첫승에서 82승까지의 기간은 18년이었다.

1960년에 댈러스로 이사해 오크클리프컨트리클럽의 헤드 프로인 얼 스튜어트의 초대로 그곳에서 연습했다. 얼은 뛰어난 코치이면서 자신의 홈코스에서 열린 PGA투어에서 우승한 마지막 클럽 프로였다. 얼과 자주 50센트 내기 매치플레이를 했는데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얼이 2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고 라이트는 드라이버 샷을 잡았는데도 말이다.

1961년에 LPGA투어 10승을 올리고 오크클리프로 돌아왔을 때 얼은 칭찬 대신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야 한다”고 자극했다. 1962년에 10승, 1963년의 13승에도 얼은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하라고 몰아쳤다. 1961년부터 4년간 메이저 8승에 총 44승을 했다. 그 기간 중 2년 동안은 LPGA 선수협의회장을 맡아 모든 칵테일 파티와 로터리클럽 대회에도 참가했다. 얼과 LPGA, 아버지와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은 선수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궤양이 생겼고, 온갖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연차가 문제가 아니라 총 주행거리의 문제였다. 그게 은퇴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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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부드러운 스윙어였던 미키 라이트.



최고의 스윙 순간

선수에게는 실력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 있다. 라이트에게는 1957년 시아일랜드오픈 마지막 라운드의 16번 홀이었다. 아슬아슬 선두였던 라이트는 커다란 벙커가 앞에 놓인 그린을 향해 2번 아이언 샷을 했다. 기온은 8.8도였고, 시속 36킬로미터의 강풍이 불어서 엄청나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이 홀 3미터 앞에서 멈췄을 때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샷은 라이트가 생각한 대로 구현되었고, 타격과 볼의 경로, 탄도와 휘어지는 라인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 대회에서 우승한 라이트는 선수생활 내내 그 샷의 느낌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라이트는 자신의 실력이 정점에 오르면 이른바 경지(zone)에 들곤 했다고 2년전 <골프다이제스트>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경지란 ‘집중이 정말 잘 되고 평소보다 강한 자신감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1964년에 루이빌에 있는 헌팅크릭에서 18홀에 62타를 기록했을 때 바로 그런 상태였다.

가장 좋아한 클럽은 6번 아이언이었다. 선수들에겐 가장 좋아하는 클럽이나 셋업할 때 다른 클럽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클럽이 있다. 라이트에게는 1963년 모델인 윌슨 스태프 다이너파워 아이언 세트의 6번 아이언이었다. 은퇴 뒤에도 그 클럽을 가지고 잠깐씩 플레이를 나가곤 했다. 거리 컨트롤이 뛰어나 파를 하기에 완벽한 클럽이었고, 티샷과 어프로치 샷을 그 클럽 하나로 해결했다. 5번 아이언은 너무 과하고, 7번 아이언은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은 USGA 박물관에 고이 전시되어 있다.

골프가 취미인 할머니

1968년 33세에 통산 80승을 달성한 라이트는 이듬해인 1969년에는 풀타임 선수에서 은퇴하고, 간간히 투어에 출전했다. 그리고 1973년 이후로는 대회에 더 안나왔다. 1967년 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 최초 헌액자 6인에 들었고, 1976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대회에 부분적으로만 출전하던 1969년에는 발목부상으로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골프를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서던메소디스트 대학에 입학하면서 15년 전인 1954년에 1년을 다니다가 그만둔 스탠퍼드 시절을 떠올렸으나 완전히 달랐고, 한 학기 만에 프로 골퍼 생활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후로 간헐적으로만 대회에 출전하다 1973년 다이나쇼어위너스서클에서 우승한 뒤론 우승을 더 이상 올리지 못했다. 이후 은퇴하고 플로리다의 집에서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2년 전 월간지 <골프다이제스트>의 인터뷰에서 플로리다 포트세인트루시의 자택에서 여름에도 골프 샷 연습으로 소일한다고 했다. 1995년에 마지막으로 한 대회에 출전한 후 뒤뜰을 연습장 삼아 사용한다고 했다. 2011년에 USGA 박물관이 미키 라이트 전시실을 꾸미면서 전시할 물건이 조금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는 매일 연습하던 인조 잔디 조각을 보냈다. 갭웨지를 가지고 샷을 하는데 비거리는 현역 때와 변함없이 100~110야드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인터뷰에서 라이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유언처럼 말했다. “천국에도 골프는 있어야 한다. 그곳에 갔을 때 2번 아이언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왕년의 시아일랜드골프클럽처럼 모든 게 고요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곳에서도 나는 1957년의 그 샷을 재현하려 할 것이다. 진짜로 천국이라면 그 퍼팅을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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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라이트 연도별 승수 한글은 당시 메이저. 마지막 우승한 다이나쇼어는 당시 메이저가 아니었음.



라이트는 지난 가을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플로리다 병원에 머물다 세상을 떠났다. LPGA 마이크 완 커미셔너는 “미키 라이트의 별세 소식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면서 “우리 레전드를 잃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골프에 있어 최고의 스윙을 잃었다”고 밝혔다.

투어 최다승인 88승 기록 보유자 캐시 위트워스는 미키 라이트에 대해 “남자와 여자를 통틀어 미키는 최고였다”면서 “샘 스니드,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머와 같은 선수들 모두와 플레이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미키처럼 공을 치지는 못했고, 투어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충분히 100승 이상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골프 명예의 전당 멤버인 톰 왓슨도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최고의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했고, 고인의 스윙 모델이었던 벤 호건조차도 ‘자신이 본 최고의 스윙’이라고 라이트를 높게 여겼다. 라이트가 어린 시절 호건의 스윙을 따라하면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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