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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경륜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①초창기 경륜을 수놓은 벨로드롬의 스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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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초창기 경륜이 진행됐던 잠실 경륜장에서 수많은 팬들이 운집해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즐기고 있다. 제공 | 국민체육진흥공단



[스포츠서울 박현진기자]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경륜 중단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경륜 마니아들은 오매불망 경기 재개를 기다리며 각종 인터넷 사이트나 SNS 등을 통해 과거 경주 동영상 시청과 선수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지루함을 달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경륜 원년인 1994년부터 벨로드롬을 지켜보고 분석한 ‘최강경륜’ 박창현 발행인이 ‘경륜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이란 주제로 소개한 내용이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갓 입문한 새내기 팬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연도별로 나열한 명단에는 내로라는 과거 은륜 스타들이 총망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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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 원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1기 허은회


◇ 원년 멤버 은종진-허은회
1994년 개막한 경륜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자전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스피드와 역전에 역전이 거듭되는 박진감 넘치는 승부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경륜의 이런 신선함과 호쾌함을 이끌어냈던 1등 공신으로는 원년 멤버인 은종진(2007년 은퇴)과 허은회가 꼽힌다.

아마추어 시절 크게 빛을 보지 못했던 은종진은 사실 부상과 개인사가 겹쳐 많은 시즌을 소화하지 못했지만 개막 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국가대표 선배들을 제치며 ‘달리는 보증수표’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적은 단연 톱이었고 거친 몸싸움도 마다않는 투지와 두뇌 플레이는 소위 ‘넘사벽’ 수준이었다. 이런 성과는 은종진만의 성실성과 경륜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입상에 실패를 해도, 심지어 낙차 경주에서도 객장의 갈채를 이끌어낸 선수는 지금까지도 은종진이 유일무이하다. 그만큼 그는 경륜 팬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1기 멤버 중 가장 화려한 아마 경력을 가졌던 허은회(1983∼1990년 국가대표)는 데뷔 직전까지 실업팀 지도자로 재직한 3∼4년간의 실전 공백과 서른이란 적지 않은 나이 탓에 1994년엔 은종진의 그늘에 가려져있었다. 그러나 매일 새벽 훈련은 물론 야간 훈련까지 소화하며 전성기 기량을 빠르게 회복했다. 그는 1990년대 초 국내 사이클을 주름잡던 원창용, 김보현, 정성기 등 2기 ‘빅3’에도 주눅들지 않을 경기력을 과시했고 특히 사상 최초로 대상 경륜 3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허은회의 장점은 힘으로 윽박지르는 젊은 선수들을 역이용하는 노련한 경기 운영과 특유의 순발력이었다. 반 바퀴를 전후할 즈음 기습처럼 후위에서 치고나와 선두권을 유지한 후 막판 직선에서 승부를 봤던 2단 젖히기나 추입전법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지금도 이런 작전을 소화하는 선수는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힘은 기본이고 고도의 순발력과 동물적인 순간 판단력이 조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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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 2기 ‘빅3’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김보현.


◇ 2기엔 ‘빅3’가 있다
경륜의 전성기는 대략 1998∼2003년까지라는 것이 중론인데 이 시기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바로 2기 선수들이다. 그중에서도 ‘빅3’로 통하는 김보현, 원창용, 정성기는 아마 시절부터 경륜 무대까지 논스톱으로 직행해 젊음과 파워를 무기로 순식간에 경륜의 모든 것을 바꿔놨다. 전반적인 시속도 빨랐지만 단순했던 반 바퀴 이후의 승부를 한 바퀴까지 늘려놨고 지역 연대 대결로까지 양상을 확대시켰다. 그만큼 경기는 더욱 스피디해졌고 전개가 변화무쌍해졌다. 팬들은 이때부터 초반 줄서기를 예측하는 등 추리하는 경륜의 묘미에 빠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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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 2기 ‘빅3’의 맏형 격이었던 정성기.


세 선수는 스타일도 제각각이었다. 맏형인 정성기가 은종진, 허은회와 유사한 추입 젖히기형이라면 원창용은 호쾌한 선행이 주무기였고 김보현은 상대나 상황에 따라 선행과 추입을 적절히 섞어내며 진정한 자유형의 모습을 보였다. 경쟁자들을 뒤로 두고 끌고 가는 전법 탓일까? 선행 전문 원창용은 리더십도 남달라 김보현과 함께 지역의 대표 선수로 부상하며 창원·경남을 전국 최강팀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엄인영, 주광일 듀오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전인 1995∼1997년까지 거의 이 세 선수가 벨로드롬을 독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적과 상금 등 각종 타이틀을 나눠가졌다. 지금은 정성기만 남아있고 원창용과 김보현은 각각 2001년, 2016년에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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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경륜인생 황금기를 누렸던 엄인영.


◇ 엄인영-주광일 전성시대
2기 ‘빅3’의 활약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다. 그해 그랑프리는 김보현이 접수했지만 시즌 성적이나 내용면에서 엄인영과 주광일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철옹성 같던 창원 연대에도 조금씩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 사상 초유의 연대율 100%를 기록한 엄인영은 결국 주광일과 연대를 이루며 그해 그랑프리까지 움켜쥐었다. 두 선수는 ‘빅3’와는 다른 스타일의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엄인영은 당시 3.50 이상의 고 기어를 사용함에도 순간 파워나 스타트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주광일은 데뷔 초엔 엄인영에 비해 화려함은 다소 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어느 위치에서도 막판까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엄청난 강점이 있었다.

엄인영은 1999년 이후 올림픽까지 출전하는 등 사이클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귀국 후 원인 모를 슬럼프에 두 차례 큰 부상이 겹치며 2006년 눈물의 은퇴를 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온화하면서도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후배 관계가 돈독했던 엄인영은 독보적인 성적과 인품을 바탕으로 수도권을 규합해 수도권이 지역 최강으로 우뚝 서는데 선구적인 구실을 했다. 어찌 보면 짧지만 굵고 강렬했던 경륜 인생이었고 남긴 족적 역시 매우 컸다. 엄인영은 현재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경륜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시리즈를 예고한 박창현 발행인은 다음 편에서 경륜의 황금시대를 연 지성환, 현병철, 홍석한 그리고 조호성 등의 활약상을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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