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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강한 2번’과 감독 시대의 종언 [이용균의 베이스볼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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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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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대 후반, 한국 야구 대표팀 부동의 테이블 세터는 정근우-이용규였다. 정확도와 빠른 발을 동시에 갖췄다. 1번 정근우가 출루해 도루를 노리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고, 콘택트 능력이 좋은 2번 이용규가 ‘커트 신공’을 펼치면서 괴롭히면 상대 배터리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좌타자 이용규가 1·2루 사이로 타구를 보내면, 발 빠른 1루 주자 정근우는 2루에 가기 쉬웠다. 빠지면 단숨에 1·3루 기회가 만들어졌다. 1루 주자 정근우, 2번 이용규 타석 때 팬들의 두근거림이 커졌다. 한국 야구 대표팀의 득점 공식이었다.

2018시즌까지도 2번 타자의 역할은 과거와 비슷했다. ‘연결해주는 타자’.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난, 이를테면, 감독의 말을 잘 듣는 타자다. 2018시즌 KBO리그 10개팀 2번 타자의 평균 OPS(출루율+장타율)는 0.795였다. 1번 타자의 0.811보다 당연히 떨어졌고, 5번 타자의 0.819보다도 낮았다. 심지어 6번 타자의 OPS 0.812보다도 낮았다.

‘말 잘 듣는’ 2번 타자는 3~5번 클린업 트리오 앞에서 ‘희생’하는 역할이었다. 어마어마한 ‘타고투저’ 시즌이었음에도 2번은 잘 치는 타자 대신, 말 잘 듣는 타자의 몫이었다.

2019년 2번 타자의 역할이 조금 바뀌었다. 2번 타자 OPS 0.736이 1번 타자 0.678보다 높아졌다. 2020시즌에는 2번 타자의 OPS가 0.805나 된다. 1번(0.730)은 물론이고 클린업 트리오 중 하나인 5번(0.774)보다 더 높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2번 타자가 5번 타자보다 더 강한 시즌을 맞고 있는 중이다.

‘강한 2번’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확인됐고, 강조돼 왔다. 번트 대는 2번은 오히려 팀의 득점력을 감소시킨다. 2번 타자가 2번째로 나오는 것은 1회뿐이다. 리그 타격 1위 호세 페르난데스를 2번 타자로 기용하는 두산 김태형 감독은 “잘 치는 페르난데스가 2번에 있으면서 하위 타순이 만든 기회를 빅 이닝으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2번 타자는 다른 타자보다 타석에 더 많이 들어선다. NC 이동욱 감독은 “여러 통계에 따르면 2번 타자는 한 시즌 약 17번 정도 더 타석에 들어선다”고 설명했다. 타석에 많이 들어서는 타자가 잘 쳐야, 팀 득점력이 높아진다.

토너먼트 단기전이라면 1점이 중요하지만, 144경기 레이스를 치르려면 긴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강한 2번’의 등장은 긴 호흡이 중요하다는 리그 전체의 태도 변화와 맞물린다. 메이저리그의 2번은 더욱 강하다. 2019시즌 리그 평균 2번 OPS는 0.820으로 5번(0.776)은 물론 4번 타자의 OPS 0.817보다도 더 높다. 3번 타순의 0.822와도 큰 차이가 없다.

KBO리그에서 5번보다 강한 2번의 등장은 ‘감독 야구 시대의 종언’이라는 또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한국 야구의 2번 타자 역할은 ‘감독의 뜻’을 이행하는 자리였다. 번트와 앤드런 등 감독의 작전으로 점수를 만들어내는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타선이었다. 번트대고, 밀어치고, 당겨칠 수 있는, 감독의 의지를 전달하는 페르소나.

5번보다 강한 2번은 ‘KBO리그 야구의 득점은 더 이상 감독이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선언과도 같다. 강한 타자가 앞 타순에 배치되면, 더 많은 타석에 들어서고, 팀 득점력과 함께 승리 확률이 높아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로 이행 중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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