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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귀 닫고 눈 감은 체육계, '살려달라' 목소리 또다시 외면했다[ST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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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 사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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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김호진 기자]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은 수영(3.9km)·사이클(180.2km)·마라톤(42.195km)의 세 종목을 연이어 겨루는 경기다. 고(故) 최숙현 선수는 자신과의 싸움은 극복해냈지만, 지도자와 동료들의 폭력·폭언 등 가혹행위는 이길 수 없었다.

최 선수는 지난달 26일 어머니께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문자메시지 한 통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비통한 죽음 직후에도 기사 단 한 줄 없었던 슬픈 사연은 지난 1일 2018 평창동계올림픽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 총감독 출신 미래통합당 이용 의원의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가족과 같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지켜줬어야 할 전 소속팀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김규봉 감독과 팀 닥터 윤 씨, 주장 장윤정 선수는 최 선수에게 폭행·폭언 등의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최 선수가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 전까지도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협회 등의 기관에 자신이 당한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해 왔음에도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모두가 우려했던 미온적인 대처가 또다시 반복됐다.

대한체육회는 최 선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에야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해당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지난 1일 대한체육회는 "해당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나 은폐 의혹에 대해 클린스포츠센터 및 경북체육회 등 관계 기관 감사 및 조사를 검토 중"이라고 짧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어 다음날 "다시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한 조처를 할 것"이라고 공식 성명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지금이 아닌 두 달 전에 먼저 취해졌다면 최 선수가 세상을 등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선수들을 보호하고 감싸줘야 할 체육계는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이렇게 피해 입은 선수들은 도대체 누구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1년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고소했을 때도 뒷북 행정으로 뭇매를 맞았던 체육계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사태 수습에 급급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고개를 숙였지만, 1년 조금 넘은 시점인 현재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무엇이 달라졌는지 직접 밝히고 넘어갔으면 한다. 체육계는 매번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뒤늦은 일처리를 해왔다. 아니 이쯤 되면 '소도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다'라는 표현이 현 상황에 더 어울린다.

가장 분개했던 점은 폭행·폭언 등 가혹행위에 의한 극단적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체육회 수장이라는 사람은 최 선수 발인이 끝난 날 열린 자선 골프 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곧바로 해명에 나섰지만, 상식선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선수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음에도 이기흥 회장은 힘껏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그러자 이를 참지 못한 40여 개 스포츠, 시민사회단체들은 일제히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달라지지 않는 방식에 신물이 난다는 것이다.

박양우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날 '최 선수가 죽음을 선택하기 전날까지 6번이나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문제를 인지한 시점은 언제인가'라는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유감스럽게도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 기존 시스템이라도 제대로 작동됐다면 이런 비극이 없어나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문체부는 지난 2일부터 대한체육회와 대한철인3종협회, 경북체육회, 경주시체육회 등에 대해 특별 조사와 감사에 착수했다. 최윤희 문체부 제2차관을 단장으로 2개 팀 13명 규모의 특별 조사단이 이를 담당한다. 또한 실업팀 관리 책임이 있는 경주시에 대해서는 지난 4일 경북도에 감사를 요청했다.

아울러 박 장관은 "스포츠 인권 전담기구인 스포츠윤리센터를 오는 8월 중으로 출범하고 선수 보호 체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늘 되풀이되고 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현실은 여전히 정의와 권리가 통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인지 모른다.

[스포츠투데이 김호진 기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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