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9 (목)

故설리 이슈에 히어로는 없다 [K-POP포커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엑스포츠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죽어서 영웅이 될 것이냐, 살아서 악당이 될 것이냐”

故 설리의 사망소식이 들려 온 이후 기자 머릿속에서 꽤 오랫동안 떠돈 문장이다. 놀란 감독 대표작인 ‘다크나이트’에 나온 대사.

물론 살아생전 설리는 이런 저런 논란을 합쳐서 생각해봐도 ‘악당’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생전 설리는 어지간한 ‘악당’보다 더 많은 비판, 더 많은 악담, 더 많은 욕을 들었다.

대중문화, 연예가십의 소비자이자 연예부기자로 밥 먹고 사는 사람 1인으로서, 설리 생전 세상과 사후 세상은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설리를 가여워 했는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리의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생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자가 그리 뛰어난 학식과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설리 생전에도 인터넷 신문 기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 그 시절 언론이 설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선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딱 두 음절로 표현할 수 있다.

‘숫자’

세 음절로 표현하면 조회수.

사실상 설리를 다룸에 있어 어떤 인사이트, 배려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무방하다. 비교적 우호적으로 썼던 기사(“설리, 눈부신 미모” 등등)라고 해도, 그냥 설리라는 소재를 쓰는 것 자체가 주목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지금 이정도 선으로 이야기한 것만 해도 꽤나 에둘러 표현한 것.

물론,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이 문제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시에 펜대 굴리던 연예부기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 인터넷 커뮤니티와 인터넷 신문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설리가 언제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떡밥을 던져주냐였다. 뭐 하나 뜨면 온 커뮤니티에서 설리 이야기를 했고, 인터넷 신문 쪽에선 최대한 빨리 포털에 설리 기사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시절 포털 뉴스 같은 경우에는 좀 늦게 썼다고 해도 최신 기사일 경우 포털 뉴스 검색 상단에 노출되는 일이 많아서 똑같은 SNS기사가 증식되는 일도 흔했다. 왜냐, 내가 포털 최상단 먹으려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설리 인스타를 재빠르게 올린 네티즌은 무수한 댓글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커뮤글 쓰는 사람 입장에선 악플보다 무플이 더 싫을 때가 있는데, 설리 글은 ‘무플방지’ 보증수표였다. 심지어 욕도 내가 아니라 설리가 먹으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

이 두 가지는 마치 무한동력처럼 돌아갔다. 설리가 인스타를 올리면 기사와 커뮤글도 올라온다. 이후 커뮤에 설리 기사가 올라오기도 하고, 기사에는 커뮤니티에서 퍼온 ‘인터넷반응’이 실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설리의 사생활 문제, 과거 논란이 주기적으로 ‘끌올’ 됐다. SNS도 크게 다를 거 없었고.

이게 아주 잠깐 불다 말았던 유행이었을까. 기자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설리 사망 이후 정치사회적 이슈에 설리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이들의 모습도 보고, 설리를 대신 할 다른 사냥감을 찾는 모습도 보게 됐다. 우리 설리 누가 죽였냐고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고, 그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위한 논리를 부지런히 쌓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안 그랬던 척, 우린 안 그랬던 척은 기본 중 기본.

그러던 와중에 설리의 절친이었던 구하라도 세상을 떠났고, 포털 연예뉴스는 악플 문제가 대두되면서 댓글이 막혔다.

그렇다고 악플 문제가 해결됐냐면 그건 아니고 인스타DM 등으로 셀럽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야말로 大인터넷 빌런의 시대.

혹자는 기자가 양비론을 펼치는 거 아니냐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양비론은 본질적으로 언급되는 대상 중 누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펼치는 전략이고, 지금 기자는 특별히 누굴 보호하고자 하는 이(이 글을 쓰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가 없다. 그냥 그 시절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보고 느낀 바를 풀어쓴 것.

‘설리 이슈의 유통자이자 소비자’라는 이름의 빌런이었던 너 나 우리의 선택지는 딱 두 개 뿐이다.

후회라도 하는 빌런(그래서 빌런짓을 멈추느냐. 혹은 최소한 덜하기라도 하느냐)이 되느냐, 아니면 죽창도 꽂고 빨대도 꽂을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빌런이 되느냐.

우리에게 히어로가 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글의 마무리는 스텔라장 ‘빌런’의 가사 중 일부다.

“We all pretend to be the heroes on the good side But what if we're the villains on the other?”
(우리 모두는 좋은 쪽에 있는 영웅인 척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편 악당이라면?)

tvX 이정범 기자 leejb@xportsnews.com / 사진 = 픽사베이
보도자료·기사제보 tvX@xportsnews.com
▶tvX는 No.1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엑스포츠뉴스의 영상·뉴미디어 브랜드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