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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0-28 ,대패에서 건져올린 체육의 건강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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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그동안 한국 체육은 늘 한 방향만 응시했다. 타자와의 대결에만 집착하는 시선, 그 세계는 무미건조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 쟁취하면 그만이라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사고가 모든 걸 지배했다. 체육에 내재된 다양한 가치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체육은 경쟁이라는 속성 탓인지 적자생존의 냉엄한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각박한 세계로 치환될 뿐이었다. 이젠 패더라임이 바뀌었다. 비굴한 승리보다 떳떳한 패배가 더 높이 평가받는 시대가 찾아왔다. 체육의 외연이 그만큼 확장됐고 결국 새롭게 조성된 체육 생태계에 맞는 다양한 체육의 가치가 개발되고 추구되어야할 게다. 체육의 철학과 지향점은 분명해졌지만 아직 체육 생태계의 변화는 지지부진하다. 변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력의 의지가 아니라 체육주체들의 각성과 노력에 달려 있다.

지난달 28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선 애처롭기 그지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제 50회 소년체전 대구지역 1차 평가대회에 출전한 대구 북구SC(스포츠클럽)과 경운중과의 경기. 엘리트 선수로 구성된 경운중과 맞붙은 대구 북구SC 선수들은 각자 다른 학교에 다니며 1주일에 한번씩 방과 후에 야구를 즐기는 중학생들로 팀을 꾸렸다. 중·고교 야구 공식대회에서 순수 클럽팀이 엘리트팀과 겨룬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작 12명의 선수가 전부인 대구 북구SC는 텃세가 세기로 유명한 중학교야구에서 엘리트팀과 겨루는 것을 놓고 고민했지만 한국 체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사명감으로 출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과는 뻔했다. 0-28, 5회 콜드게임 패. 그것도 노히트노런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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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북구SC 야구팀. 맨 오른쪽이 홍순천 감독.


대구 북구SC를 이끌고 있는 홍순천 감독은 프런티어의 굳센 철학을 지닌 지도자다. 획일적 가치에 매몰된 기존 체육에 물들지 않고 새로운 체육 생태계 구축을 필생의 신념으로 실천하는 지도자답게 그는 주위의 냉소와 비난을 뒤로 한채 출전을 감행했다. 홍 감독의 공식대회 출전 소회는 따뜻하고 당당했다.

“선수들이 마음으로 느낀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대구 시민야구장이라는 역사가 서린 큰 야구장에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경험이요,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경험과 추억을 안겨준 것만 해도 체육의 큰 가치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부끄럽지 않다. 아이들이 경기가 끝난 뒤 ‘카톡’을 통해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자기들끼리 생각을 공유하며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다. 나 스스로도 많을 걸 배웠다. 세상에는 승리보다 더 소중한 게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랬다. 0-28의 대패,그러나 그 경기에선 많은 것들이 샘솟았고 꿈틀거렸다. 선수들의 눈빛에선 패배의 부끄러움보다 밝은 미래를 다짐하고 꿈꾸는 게 생생하게 엿보였다. 이들을 상대했던 경운중 선수들도 매한가지다. 기존 엘리트팀과 맞붙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소중한 것들을 스스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 차가 현격한 대구 북구SC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배려와 존중의 가치를 배웠다. 그게 바로 새로운 체육 생태계가 추구해야 할 체육의 다양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 체육의 문화와 토양은 획일적이다. 승리라는 가치를 향해 모든 게 집중돼 있다. 물론 체육에서 경쟁의 가치를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승리는 더이상 존중받을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됐다. 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사회는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 발전이라는 꽃은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다양성의 가치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튀우며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사회는 사회적 힘을 집중시키기는 유용하지만 발전의 동력이 바닥나거나 한계상황에 직면할 경우 위기돌파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에너지는 전위(電位) 차에서 발생한다. 사회의 진보와 발전 역시 다양성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보면 한국 체육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지점은 자명하다. 그동안 한국 체육은 오로지 경기력에만 집중해 승리라는 편향되면서도 압도적인 가치에만 집착해왔다. 그 한계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게 바로 요즈음이다.

돌파구는 역시 다양성의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획일적 가치는 무섭다. ‘다름’을 배척하고 이를 ‘틀림’으로 치환해 배제와 혐오라는 편향된 집단정서를 불러일으켜 사회를 진영의 논리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진영에서 이탈한 자들에겐 늘 그렇듯 날선 증오와 혐오의 올가미를 씌운다. 바야흐로 한국 체육의 생태계도 다양성의 가치가 꽃피울 그런 시대로 접어들었다. 대구 북구SC가 0-28의 대패에서 건져올린 건강한 체육의 가치를 되새겨볼 때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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