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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부처가 된 호랑이, 부산 KCC 원년 우승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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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라운지]

최고령 우승 신화, KCC 전창진 감독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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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진(61) 감독은 ‘치악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2002년 원주 TG(현 원주 DB) 지휘봉을 잡은 뒤로 호랑이처럼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작전시간 때 카메라가 비추든 말든 고함을 질렀다. 전술 지시를 하던 중 펜을 집어던지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런 용장(勇將) 리더십으로 세 번의 우승(2003·2005·2008년)을 차지했다.

첫 우승에서 21년이 지난 올 시즌, 전창진 부산 KCC 감독은 폭언을 끊었다. 지난 3월 KCC 곽정훈(26)이 패스를 받지 못하자 화를 삭이느라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당시 전 감독은 작전시간에 ‘어디서 그런 나쁜 버릇을 배웠느냐’라고만 말하고 넘어갔다. 이 장면이 유명해지자 “치악산 호랑이 이빨이 다 빠졌다” “해운대 부처가 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전 감독은 올 시즌 덕장(德將) 리더십으로 KCC의 한국농구연맹(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다. 정규 리그를 5위로 마쳤지만 절치부심해 포스트 시즌에 우승컵을 들었다. 허웅, 최준용, 송교창, 라건아 등 스타들을 잘 섞어냈다. 5위 팀이 우승한 건 KBL 역사상 처음이었다.

조선일보

그래픽=백형선


전 감독은 “약이 오른 덕분에 우승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시즌 내내 ‘수퍼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성적이 나오지 않아 저도 그렇고 선수들도 힘들었다”고 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최준용이 합류하고, 송교창이 상무에서 돌아오면서 KCC는 베스트5가 전부 국가대표 출신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부상이 겹친 탓에 정규 리그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허)웅이가 찾아오더라고요. ‘감독님, KCC는 수비를 잘 못하는 팀인 것 같습니다. 공격에 더 치중하시는 건 어떨까요?’ 웅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코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공격 위주 전술로 개편했죠.” 선수가 감독에게 전술을 권유하는 건 월권이지만, 전 감독은 “맞는 말이니 받아들였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말에 전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느낀다. 내가 아날로그라면 요즘 선수들은 디지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선수들을 빡빡하게 끌고 가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제는 나이 먹었다고 짜증 내고, 화내고...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것 같지 않더라고요. 일단은 선수들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주려고 해요. 훈련 전후에도 최대한 터치를 안 하려고 하는 것도 이전과 다르고요.”

전 감독은 챔프전 4차전을 앞두고 최준용을 벤치에 내리면서 “면담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4차전을 마친 최준용은 “그건 면담이 아니라 잔소리라고 한다”라고 했다. 송교창은 우승을 차지한 뒤 세리머니에서 전 감독에게 격투기 기술인 암바(팔 꺾기)를 걸기도 했다. 그만큼 가까워졌다. 전 감독은 “준용이는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선수다.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는 친구다. 교창이도 정규 리그 MVP까지 받았던 선수인데 순순히 궂은일을 도맡았다. 한 발짝씩 양보해준 선수들에게 전부 고맙다”고 했다.

전창진은 만 39세였던 2003년 원주 TG를 이끌고 정상을 차지하면서 KBL 역대 최연소 우승 감독이 됐다. 그리고 올 시즌엔 만 60세로 역대 최고령 우승 감독 간판까지 얻었다. 전 감독은 “예전에는 챔프전을 마치면 힘이 없어서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많이 내려놓은 덕분인 듯하다”고 했다.

전창진 감독은 지난 8일 고(故) 정상영 KCC 명예회장 산소 앞에 우승 트로피를 놓고 절을 했다. 전 감독은 2015년 승부 조작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사실상 농구계에서 퇴출됐다. 2019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KCC가 사령탑에 앉히면서 기회를 줬다. 그는 “‘믿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해냈습니다 회장님’이라고 말하고 왔다”고 했다.

전 감독은 “부산 팬들에게도 감사하다”고 했다. KCC는 올 시즌을 앞두고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야구 인기에 밀려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는데, 챔프전 3~4차전 1만명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전 감독은 “그날은 경기가 끝나고도 1시간 넘게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드렸다. 관중의 함성만큼 힘이 되는 건 없다. 다음 시즌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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