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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다니엘 산체스, 13번 도전 끝에… ‘3쿠션 전설’ 자존심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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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철의 스포트S라이트]

작년 PBA 데뷔 후 연신 쓴맛… 첫 감격의 우승 차지한 산체스

조선일보

세계 당구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페인의 다니엘 산체스가 시합에 몰입하는 모습. /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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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치러진 PBA(프로당구투어) 에스와이 바자르 하노이오픈 남자 결승. 엄상필(우리금융캐피탈)을 4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순간, 스페인의 ‘3쿠션 전설’ 다니엘 산체스(50)는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는데 참았다”고 했다. 그럴만도 했다. 그는 2년전까지 PBA무대를 주름 잡았던 프레데릭 쿠드롱(벨기에), 아직 PBA무대에 들어오지 않은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함께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3쿠션계의 전설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PBA투어 데뷔 이후 우승은 커녕 1라운드에서 탈락한 적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안된다”고 했을 때, 산체스는 13번째 도전에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최근 연습장이 있는 경기도 고양에서 만난 산체스는 “우승도 우승이지만 그것보다 내 게임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며 “이제는 마음 편하게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드디어 우승했다.

“드디어(finally).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세계 톱 클래스였던 내 수준에 맞는 경기, 내가 만족할 만한 플레이가 안 나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128강(1회전)에서 탈락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4대 천왕 아닌가. (산체스는 수없이 들었는지 4대 천왕이란 한국단어가 나오자 곧바로 미소로 반응했다)

“일부 팬들은 ‘내 시대는 끝났다.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격려하고 응원해주셨다. PBA라는 무대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와 같이 PBA에 온 사이그너도 첫 대회 이후 우승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나

“모두 다. 내 생활 자체가 아예 다 바뀌었다. 내가 수십년간 뛰었던 무대와 PBA는 모든 게 다 달랐다. UMB(세계연맹)때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집에 가끔 들르는데, 여기서는 2~3개월 동안 한 곳에 머무르면서 경기 한다. 공과 테이블뿐 아니라 조명도 달랐다. 규칙도 달랐다. 처음 와서 경기하는데 아예 휴대폰을 달라더라. UMB는 무음으로 하거나 전원을 끄면 아무 문제 없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조선일보

그래픽=김하경


-UMB와 PBA는 어떻게 다른가.

“레벨은 비슷하다. PBA에도 좋은 선수들, 최고 레벨 선수들이 많다. 가장 큰 차이는 경기장 분위기다. UMB는 올드 스타일이다. 진지하고 조용하다. 경기할 때 심판 콜과 약간의 박수 소리만 들린다. PBA는 장내아나운서에 치어리더까지 있다. 팬들도 응원하면서 경기를 즐긴다. UMB에 오래 뛴 사람들은 처음엔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적응하면 모두 좋아할 것이다.

-팀 리그도 처음 겪는 경험일텐데

“분위기나 플레이방식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보통 경기 있는 날 6시간 정도를 경기장에서 보내는데 내 경기 시간은 10~2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날도 있다. 정말 어색했다. 하지만 팀 리그는 팀을 위한, 동료와 함께 하는 ‘우리’의 시간이다. 배울 점도 많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나도 우리 팀 선수가 잘 치면 ‘파이팅’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훈련은 어느 정도 하나

“보통 오전 9시 30분쯤 훈련장에 나온다. 많이 할 때는 밤 10시까지 한 적도 있다. 연습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치는지 본다. 보는 것도 연습의 일부다. "

-낯선 한국생활도 어렵지 않았나.

“십대 시절부터 일년에 서너차례는 한국을 방문했다. 스페인과 문화가 다르지만 한국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고,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존중해 주는 점이 너무 좋다. 당구, 3쿠션에 관해 한국은 최고의 나라다. 내가 살고 있는 바르셀로나에는 당구장이 3개뿐인데, 한국은 어딜 가도 당구장이다. 한국음식은 불고기, 삼겹살 정도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좋아하는 메뉴가 더 많아졌다. 매운 것도 이젠 먹을 수 있다. 김치, 떡볶이. 당구 치지 않을 때는 스페인 선수끼리 시간 보낸다. 당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

-가족과 떨어져 있어 외롭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시즌 동안에는 오지 않는 게 더 좋다. 가족은 당구인이 아니니까. 방학이나 휴가때 내가 스페인으로 간다. 16살 딸이 한국 문화, 특히 K팝과 댄스에 관심이 많다. 일주일에 3번 정도 댄스학원에 간다. 내가 딸을 한국에 데려오지 않는다면 굉장히 화를 낼 것 같다.”

- PBA투어 출범 때부터 합류하지 않은 이유는?

“2019년 당시 PBA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E조건과 분위기 등 여러 이유 때문에 거절했다. 언젠가 PBA에서 뛰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2년전 친분 있는 김가영선수에게 연락해 합류 의사를 밝혔다. PBA가 상금뿐 아니라 경기 운영적인 면에서 체계가 잡혀있어 많은 외국 선수들이 합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스퍼스도 내게 가끔 PBA에 대해 물어본다.”

-첫 우승 물꼬를 텄으니 다음 우승은 시간 문제아닌가.

“글쎄, 우승할 수도 있고, 과거처럼 1라운드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당구다. (산체스는 자신의 말처럼 다음 대회인 크라운해태챔피언십에서 1회전 탈락했다) 나만의 게임을 하는 게 중요하다. 30년동안 내가 보여준 건 한결같았다. 침착하게, 어려운 포지션에 대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게 나만의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처음 왔을 때에는 공 하나 하나 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다.”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것인가.

“내가 더 이상 당구를 즐기지 못할 때까지. 내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까지는 계속 큐를 잡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오래 뛰고 싶다.”

[강호철 스포츠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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