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 노인지 역
공허로 채운 눈빛, 폐허가 된 삶 연기
“완벽 지향 내려놓고 작품에 녹아 들어”
배우 서현진 [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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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고 메마른 들판처럼 공허했다. 불현듯 찾아온 파경을 맞은 후로 여자의 삶은 깊이 패인 웅덩이를 메운 고인 물이 됐다. 연꽃처럼 피어난 곰팡이가 그득해도 그는 썩는 줄도 몰랐다. 감정이 거세된 눈빛과 창백한 낯빛을 한 그의 삶은 위태로워 보였다.
명실상부 ‘흥행퀸’ 서현진이 완전히 새로운 옷을 입었다. 누구라도 놀랄 만큼 바짝 마른 그는 무언가를 견디듯 입을 앙 다문 채 화면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촬영을 순서대로 하지 않아 첫 신에선 살이 많이 빠진 때였어요. 일부러 뺀 건 아니었는데, 제가 봐도 흉하더라고요. (웃음)”
살이 빠진 이유는 촬영장에서 늘 함께 했던, 13세가 된 서현진의 반려견 때문이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챙길 것이 많은 강아지를 돌보다 보니 “힘이 들었다”며 웃는다. 생기를 찾은 눈은 이미 캐릭터를 벗었지만, 서현진에게 남긴 여운은 짙었다. 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를 통해 상처투성이 내면을 끌어안고 매일을 사는 노인지 역을 맡았다.
서현진은 “인지는 시한부, 성소수자처럼 어딘가 외로운 사람들의 사연을 외면하지 못하는 상냥한 사람이라서 좋았다”며 “이타적이고 남을 위해 화낼 줄 알지만,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고 방관하는 것도 현실적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사랑과 사람, 관계를 이야기한다. 이른바 ‘기간제’ 계약 결혼을 통해 연을 맺은 네 남녀의 얽히고 설킨 미스터리 멜로물이다. 서현진이 연기하는 노인지는 양성애자 남자친구와의 파혼 이후 송두리째 망가진 삶을 견디기 위해 ‘계약 결혼’의 날들을 산다. 인지와 정원(공유 분)이 만나게 된 계기다.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 [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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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내고 배우자를 얻는 부부 서비스라는 설정, 파격적인 노출, 시종일관 어두운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공개 이후 호불호가 갈렸다. 서현진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앵글도, 색감도 제 취향에 가까웠다”며 “감정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연출로 분위기를 표현한 점이 좋았다”고 했다.
드라마적 장치로 ‘기간제 부부’, 살인사건이라는 설정이 들어왔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 안에선 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이 서로를 상처입히기도, 서로를 치유하기도 한다. ‘계약 결혼’을 통해 인지는 가정폭력과 어머니의 죽음, 전부인 서연(정유하 분)의 일그러진 사랑에 내몰린 정원(공유 분)을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구원자로 자리한다. 인류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구원 서사’가 미스터리와 파격의 외피를 입고 나온 것이다.
“대본을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이 보였어요. 전 이 드라마가 선택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관계의 이야기 같기도 하더라고요.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더라고요. 그러다 마지막엔 남녀의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의 성장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 안에서 서현진은 언제나 2030 여성들이 선호하는 얼굴이었다. 동떨어진 동화속 로맨스를 그리는 여주인공이 아닌, 내 옆의 친구 같은 모습으로 자리했다. 사랑을 잃고, 직장도 잃어 울다 지쳐 스러지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힘으로 다시 섰다. ‘식샤를 합시다2’, ‘또! 오해영’부터 ‘낭만닥터 김사부’, ‘뷰티 인사이드’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는 걸그룹 밀크 출신 연기자를 ‘로코 퀸’ 자리에 올려뒀다.
‘트렁크’의 서현진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뜨거운 일렁임은 잠재운 고요한 호수의 모습으로 드라마의 분위기를 매만진다. 철저한 연기 분석, 흠 잡을 데 없는 딕션과 각각의 캐릭터에 딱 맞는 연기, NG 한 번 내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서현진은 이 작품에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마주했다.
그는 “그동안 해온 것과는 다른 결의 작품을 선택했으니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었다”며 “여백이 많은 작품이니 너무 꽉 짜인 연기 대신 스스로를 열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 서현진 [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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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없이 채워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보단 스스로를 놓아뒀다. 연출을 맡은 김규태 감독은 “서현진은 원래 정통적인 정석 플레이를 하는 배우인데 이번엔 스스로를 뭉갠다거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맡겼다”고 했다. 무수히 많은 말을 하기 보다 인물들의 표정과 눈빛, 존재 자체가 연기가 되는 극 안에서 서현진은 온 몸이 연기의 도구였다. 슬픔을 내지르는 대신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그 때마다 드러나는 가느다란 등줄기와 동그란 뼈는 인지의 고통을 그렸다. 서현진의 아이디어로 태어난 명장면이다. 그는 “이 정도로 잘 보일지 몰랐고, 이렇게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지 몰랐다”며 웃었다.
“‘트렁크’를 찍으면서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됐어요. 연기를 잘한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튀어 보인다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대한 작품에 묻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의 전, 더 보여주기 보단 조금 덜 하려는 생각을 해요.”
‘안정지향형’ 인간이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시간표가 단순한 게 좋다는 자연인 서현진은 이번 드라마를 지나오며 삶의 태도에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다. 썩어가는 줄도 몰랐던 삶에서 빠져나와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인지의 태도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움직이지 않으면 썩는다는 것을 저 역시도 알게 된 것 같아요. 속이 시끄러워 단순한 삶을 좋아했는데, 뭔가 해본다고 큰 일이야 나겠냐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 한해 뭔가를 많이 정리도 하고, 변화도 생겼어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8년 만이고, 예능 프로그램도 나가 보고요. 내년엔 이 변화의 후폭풍을 맞게 되겠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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