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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일)

다시 노래하는 정태춘·박은옥 “밥 딜런에 자극…좋은 노래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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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13년 만에 12집 ‘집중호우 사이’ 발표

韓 대중가요가 이룬 최고의 문학적 성취

“야만의 벽 돌파하는 지성의 힘 생각하길”

가수 정태춘(오른쪽)과 박은옥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간담회에서 열창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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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직 내 젖은 발목만큼도 올라오지 못한 어린 잎새들, 전쟁 같은 폭우 장마에 강물 흐르는 주택가, 멀리 포성과 섬광이 멎고 문득 지리멸렬해지면, 그 갯벌 키 작은 갈대밭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들이. 질퍽한 각자의 참호에서 간지러운 햇살 기다리리라” (’집중호우 사이 중)

오래 품은 마음의 시들이 다시 노래가 됐다. “더 이상 새 노래를 하지 않겠노라”고 했던 정태춘(71)은 “내 안에서 노래가 나왔고,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대표 포크 뮤지션이자 부부 듀오인 정태춘(71)과 박은옥(68)이 다음 달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를 발표한다. 두 사람이 새 정규앨범을 내는 것은 지난 2012년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 13년 만이다.

정태춘은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 간담회에 참석,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새 노래를 만들어 여러 사람 번거롭게 했다. 결과는 중요치 않다.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9년 다큐멘터리 음악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서도 작곡을 절필한 그가 다시 노래를 쓴 것은 우연히 밥 딜런을 만나면서다.

“마포도서관에 손녀를 데려갔다가 밥 딜런의 가사집을 만나게 됐어요. 1000페이지가 넘는 곡이 담겨있었죠. 그의 방대한 노래와 작품을 만나고 그러다 레너드 코헨과 비틀스의 가사까지 찾게 됐어요. 수많은 가사와 전혀 다른 세계관, 환경, 방대한 말에서 예술적 영감이나 강렬한 인상은 없었지만, 분명한 자극을 받았어요.”

박은옥은 그때를 2022년으로 기억한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며 내리 30편 이상의 글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내속에서 자꾸 노래가 나온다’는 그 말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수의 사람에게 전해지더라도 ‘다시 아날로그적인 노래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일 수 있는 음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녹음한 것이 이번 12집이다.

가수 정태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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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시작한 곡 작업은 이듬해인 2023년에 녹음을 마쳤다. 앨범에는 음반과 같은 제목을 한 ‘집중호우 사이’를 비롯해 ‘기러기’, ‘도리 강변에서’, ‘엘도라도는 어디’, ‘솔미의 시절‘’ 등 총 10곡이 담겼다. 박은옥이 부른 ‘민들레 시집’과 ‘폭설, 동백의 노래’도 실렸다.

한 줄 한 줄 곱씹어 써 내려간 10곡의 노랫말은 한국사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한 기억의 시간을 담은 장대한 산문시처럼 들렸다. 그 흔한 각운도 없이 흘러가는, 한 편의 수필이었다. 한 곡의 노래 안엔 후렴구나 중심 소재 외엔 반복되는 어휘도 없다. 한국적이고 서정적인 문장에 담긴 시대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태춘은 “한국 문학에 진 빚, 한국 현대사와 거기의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며 “그것이 내게 줬던 영향, 저 많은 빚을 갚기 위해 내 안의 더 깊은 곳에서 웅얼거리는 모든 노래들을 더 늦기 전에 불러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음악이 “언어 혹은 문학적 표현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칠순을 넘긴 시점에도 세상을 응시하는 정태춘의 시선은 여전히 낮고 여린 곳, 무너지고 밟히고 사라진 곳을 향해 있다”며 “그의 노래는 문학적 지향이 강력한 음악적 질감을 만들어낸 희귀한 사례들”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 앨범은 지금껏 한국 대중가요가 이룩한 최고의 문학적 성취이자 한국적 포크 음악 영역에서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놨다”며 “한국문학에 진 빚을 갚는 수준을 넘어 한국 문학에 더해진 또 하나의 탁월한 문학적 성과”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태춘은 1978년 1집 ‘시인의 마을’로, 박은옥은 이듬해 ‘회상’으로 데뷔해 1980년부터 음악적 동료이자 삶의 동반자로 함께 하게 됐다.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모순과 저항을 노래에 실었고, 사회운동 성격의 순회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통해 ‘실천하는 음악가’로 격동의 시기를 함께했다.

1990년대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1990)과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앨범을 통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가요 사전 심의를 거부했다. 두 장의 앨범을 계기로 1996년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정태춘은 당시를 떠올리며 “사회 고발적이거나, 저항적이거나, 저항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노래는 도구적인 노래”라며 “지금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도구적인 노래를 쓰겠다. 그런 노래가 필요한 시기가 있고, 이 싸움에서 피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의 음악은 시대에 따라 다른 흐름을 보였다. 그는 “우리 현실의 구체적 사안들에 관해 관심을 집중하는 게 중요할 때가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문명의 전반, 현대사와 전체 역사를 바라보는 쪽으로 관심이 변화했다”며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나, 그리고 그 삶에 대한 관심에서 ’우주 속의 나는 무엇인가‘ 로 관심의 변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상황 등 변화 과정에서 충실하게 나의 이야기를 해왔다”고 했다.

가수 정태춘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2025 정태춘 박은옥 문학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 기자간담회에서 노래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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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어느 시대도 부끄러운 것은 없다. 나의 생각대로 잘 변화해 왔고, 그 변화는 좋았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래와 함께 해온 지 어느덧 45년. 여전히 노래는 그들에게 행복이다. 박은옥은 “젊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노래하는 사람이라 너무 행복하다‘는 감정을 나이 들어 더 느낀다”며 “다시 태어나도 음악인이고 싶다. 다만 정태춘처럼 창작의 재능도 함께 가지고 태어나면 좋겠다”고 했다. 정태춘에게도 노래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행복이다. 그는 “노래가 가진 힘과 설득력, 노래로 할 수 있는 말의 방법과 표현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며 “노래는 문학의 다른 장르보다 특별한 소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노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붙잡고 왔다”고 돌아본다.

이번 앨범 발매와 함께 정태춘과 박은옥의 2025년 문학 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가 함께 시작된다. 오는 5∼7월 전국 투어 ‘나의 시, 나의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6월엔 정태춘의 붓글전 ‘노래여, 노래여’가 관람객을 맞는다. 노래 시집 ‘집중호우 사이’와 붓글집 ‘노래여, 노래여’도 출간되고, 1994년 한울출판사에서 발행된 노래집 ‘정태춘’·‘정태춘 2’도 31년 만에 복간을 계획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야만의 벽을 돌파하는 지성과 양식의 힘을 생각해 보고자 ‘벽을 깨다’는 제목을 붙였어요. ‘좋은 노래’는 나의 감정, 나의 취향 안에서 가장 잘 다듬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노래, 이성과 감성까지 흔들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책과 노래에 담긴 나의 세계관을, 마음을 열고 들여다봐 주기를 바랍니다.” (정태춘)

“임상춘 작가를 좋아해 ‘폭싹 속았수다’를 울면서 보고 있어요. 드라마는 20대에서 60대까지 다 아우르며 감정을 전하고 마음을 흔드는데, 왜 노래는 그게 어려울까 싶더라고요. 그럼에도 (우리 노래가)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젊은 세대에게 친구처럼 힘과 응원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박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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