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졌.잘.싸'로 최약체 라오스 약진 견인
하루 7,000원인 선수 수당 두 배 인상 등 환경 개선
현재 라오스 협회와 재계약 논의 중
"성사되면 내년 현대컵서 빠른 축구 선보일 것"
동남아시아에 '작은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하혁준 라오스 축구대표팀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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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박항서 매직'이었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계에 남긴 업적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한국인 사령탑 붐'을 일으켰다. 신태용(인도네시아), 김판곤(말레이시아), 김상식(베트남) 감독이 연달아 지휘봉을 잡았고, 저마다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기며 팬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축구 한류'에 주연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같은 무대에서 고군분투하며 '작은 한류'를 만들어 가는 조연도 있다. 지난해 8월부터 '동남아 최약체' 라오스 대표팀(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90위)을 맡아 약진 중인 하혁준(55) 감독을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동남아 주요국 FIFA랭킹 |
"대표팀 소집을 해도 안 오는 선수들이 있어요. 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 감독은 인터뷰 시작과 함께 냉혹한 현실부터 꺼냈다. 그는 "라오스 국가대표 선수들이 받는 하루 수당은 한국 돈으로 7,000원 정도"라며 "반면 한인 식당에서 일하면 1만5,000원 정도 수입을 올린다. 그러니 소속 클럽팀에 남아 훈련을 마친 뒤 식당에서 서빙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선수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대표급 선수들도 '투잡'을 뛰어야 할 만큼 축구 환경이 열악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라오스에선 축구 선수와 택시 기사를 겸하거나, 훈련 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흔하다.
하혁준 라오스 축구대표팀 감독이 라오스의 열악한 축구 환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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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수당만이 문제가 아니다. 하 감독은 "감독 부임 당시엔 체계를 갖춘 훈련 프로그램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헬스장조차 없었다"며 "셔틀런(20m) 기록이 한국 중학생 선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고 돌아봤다. 선수층도 처참할 만큼 얇다. 그는 "라오스 리그에서 세미 프로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팀은 상위 세 팀 정도”라며 "대표팀을 ‘선발’하는 게 아니라 '긁어모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대표팀의 환경과 전술, 시스템을 동시에 바꾸는 쪽을 택했다. 먼저, 창고를 비워 체육관을 마련한 후 운동기구 20여 개를 채워 넣었다. 라오스 축구협회에는 △대표팀 수당 3배 인상 △합숙 훈련 보장 △식당 및 식단 개선 등을 공식 제안했다. 요구사항이 100%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라오스 축구 환경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그는 "최근 열린 동남아시안게임부터 수당이 두 배로 인상됐다”며 미소 지었다.
하혁준 라오스 축구대표팀 감독이 부임 후 변화하고 있는 대표팀 환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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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위에서는 5-4-1 포메이션을 도입해 '선수비 후역습'이라는 명확한 팀 컬러를 구축했다. 그는 "이전 감독들은 4-2-3-1 등으로 포메이션을 짰는데, 선수들의 능력과 전술 이해도가 부족해 공간을 너무 많이 허용했다”면서 "축구 이론부터 가르치며 왜 우리가 5-4-1을 써야 하는지 이해시키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하 감독의 노력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미쓰비시일렉트릭컵(미쓰비시컵)에서 인도네시아(3-3)와 필리핀(1-1)을 상대로 깜짝 무승부를 거두며 강한 인상을 남겼고, 2027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안컵 예선에선 네팔에 2-1 승리를 일궈냈다. '동남아 강호' 베트남을 상대로는 아시안컵 예선 홈 개막전(0-2), 동아시안게임(23세 이하) 개막전(1-2) 등에서 아쉽게 졌지만, 골키퍼 실수와 애매한 심판 판정 등이 겹쳤을 뿐 경기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라오스 축구협회와 재계약을 논의 중인 하혁준 감독이 향후 목표와 각오를 설명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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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하 감독 혼자서 일궈낸 결과물이다. 그는 "예산 문제로 전임 코치진을 꾸리기 어려워 단기 계약 형태로 코치진을 고용하는 상황이다. 봉사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코치들도 있다"며 "사실상 혼자 팀을 꾸려야 하는데, 감독이 되기 전 피지컬 코치, 전력 분석 업무 등을 맡았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로 라오스 대표팀과 계약이 끝나는 하 감독은 현재 협회와 재계약 논의를 진행 중이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라면서도 "만약 라오스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면, 내년 현대컵(미쓰비시컵의 새 이름)에서는 한층 더 빠른 팀, 공간 활용을 잘하는 팀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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