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공백기에 약점이었던 서브를 보완한 정현은 호주오픈에서 최고 시속 200㎞를 넘는 서브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 대한테니스협회 |
[스포츠서울 유인근 선임기자]‘돌풍’이 아니라 ‘태풍’이었다. 한국 테니스의 ‘에이스’ 정현(58위·삼성증권 후원)이 그랜드슬램 대회 ‘4강 신화’를 썼다.
정현은 24일 호주 멜버른의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펼쳐진 2018 호주오픈 남자단식 8강전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미국·세계랭킹 97위)을 3-0(6-4 7-6<7-5> 6-3)으로 으로 제압하고 준결승에 진출해 한국 테니스의 역사를 또한번 고쳐썼다. 샌드그렌의 돌풍은 정현이 몰아친 태풍 앞에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정현은 서브 능력에서만 밀렸을 뿐 파워와 공격력, 수비력, 경기운영 능력에서 모두 샌드그렌을 압도하며 준결승에 안착했고 이제 결승 진출을 바라보게 됐다. 그렇다면 불과 2년 전까지만해도 위기의 선수로 여겨졌던 정현이 짧은 시간에 급성장한 비결은 뭘까. 이번 호주오픈에서 전세계 테니스팬들의 관심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정현발 태풍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 선천적 약시 때문에 쓴 고글 트레이드마크 되다
시속 200~300㎞의 공들이 날아다니는 테니스는 다른 어떤 종목보다 시력이 좋아야 하는 스포츠다. 하지만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나쁜 시력 때문이었다. 7세 때 선천성 약시 판정을 받은 정현은 녹색을 보는 게 눈에 좋다는 의사의 말에 녹색 테니스 코트에서 뛰놀기 위해 처음 라켓을 잡았다.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는 아마추어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 하부 투어를 통해 프로에서도 차근차근 성장했다. 정현의 시력은 지금도 나쁘지만 일찍부터 고글을 착용해 그 불편함을 극복했다. 고글은 세계적 테니스 스타 정현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정현의 포핸드. |
◇ 4개월의 공백, 더 강해져 돌아왔다
2014년 프로로 전향해 승승장구하던 정현에게 결정적 위기가 찾아온 곳은 2016년이다. 복부 부상에다 테니스 기본 중 기본인 포핸드 스트로크에서 입스(샷 실패 불안 증세)가 찾아오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유망주였던 그는 돌연 투어 중단을 선언했다. 그토록 바랐던 리우올림픽 티켓까지 반납하고는 4개월동안 잠수를 탔다. 정현은 그렇게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정현은 이 시간을 방황으로 허비하지 않았다.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가 기본부터 다시 다졌다. 초심으로 돌아가 자세교정을 했고 또 전 테니스 국가대표인 박성희 박사와 정기적인 심리 상담을 통해 정신력을 새로 무장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더욱 단단해져 코트에 복귀했다. 부담스러웠던 테니스는 어린시절 그랬던 것처럼 즐거움이 됐다. 정현은 지금도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시기가 제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슬럼프 때 대회 출전에 급급했다면 지금의 정현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 약점이던 서브와 포핸드 수준급으로 단금질
정현은 그동안 서브와 포핸드에 약점이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백핸드는 세계 정상급이지만 서브와 포핸드가 약해 더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란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그는 최고 시속 200㎞를 넘는 서브를 보여줬고 포핸드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2016년 4개월의 공백기간 동안 자신의 약점을 차례로 보완한 덕분이다. 그립부터 바꾸고 포핸드를 다시 배웠고 일본 코치를 초빙해 서브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다. 그 결과 서브의 경우 예전에 비해 어깨 회전이 커졌고 발을 이용해 공에 체중을 싣는 동작이 개선되면서 스피드가 늘었다. 포핸드도 타점이 높아지고 공을 치는 타이밍이 빨라져 공격적인 샷을 구사하게 됐다. 이를 위해 정현은 누구보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정현의 강력한 백핸드는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
◇ 세계적 코치 고드윈 만나 경기능력 ‘업그레이드’
정현은 지난해 12월부터 태국동계훈련에서 네빌 고드윈 코치(남아공)의 지도를 받고 있다. 고드윈 코치는 지난해 US오픈 준우승을 차지한 케빈 앤더슨(남아공)을 가르쳤고 2017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올해의 코치상을 받은 명품 지도자다. 상승세의 정현과 빈틈 없는 고드윈 코치는 찰떡궁합이다. 고드윈 코치는 특히 정현의 ‘예비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 장단점은 물론 습관까지 파악한 뒤 정현에게 ‘족집게 과외’를 제공했다. 고드윈 코치는 “정현은 세계 랭킹이 낮은 편이 아닌데도 얼마든지 더 기량이 향상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가르치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정현은 “동계훈련 때도 잘 맞춰왔기 때문에 아직 짧은 기간이지만 발전한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타이브레이크 5전5승, 승부처에 강했다
정현은 이번 대회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승부사의 기질을 보여줬다. 강한 멘털과 끈질긴 수비, 강력한 스트로크를 앞세워 5번의 타이브레이크 상황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2회전 다닐 메드베데프(53위·러시아)와 경기에서도 1세트 타이브레이크 접전 끝에 7-6<4>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3회전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와 대결에서도 2세트를 7-6<3> 타이브레이크로 따냈고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와의 16강전에서는 2번의 타이브레이크를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8강전에서도 샌드그렌과의 2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7-6<2>로 승리해 3-0 완승을 이끌었다. 승부처에서 더 강해지는 정현이다. 4강, 그 이상의 태풍을 기대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이제 자신의 우상이던 로저 페더러와 결승행 티켓을 놓고 맞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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