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8 (월)

이슈 [연재] 매일경제 '쇼미 더 스포츠'

테니스 그랜드슬램 4강 의미와 정현의 미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테니스 호주오픈 4강 기적의 주인공 정현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반얀트리호텔에서 라코스테 주최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쇼미 더 스포츠-75]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이 금의환향했다. 정현은 시즌 첫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오픈 16강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에게 승리하고 4강에서 로저 페더러와 맞붙는 등 한국 테니스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고 돌아왔다. 테니스계 한 인사는 "예전에는 선수가 잘하면 테니스계에서만 흥분했었는데, 이번에는 전 국민이 흥분했다"는 말로 벅찬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는 없던 격한 환영에 21세의 젊은 테니스 스타는 들뜰 만도 했지만, 그는 이 같은 분위기를 적당히 즐기며 또 절제할 줄 아는 듯했다. 하지만 정현은 이런 주변 상황보다는 테니스에 대한 열정과 의욕으로 더 가득 차 있는 듯 보였다. 주변의 기대와 환호와는 별개로 세계 테니스계에서 최정상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정현은 지난 2일 본인의 기자간담회에서 "호주오픈 4강에 오른 만큼 언젠가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많은 미디어들이 정현의 이런 코멘트를 크게 부각시켰고 팬들 또한 정현의 메이저 우승이 머지않은 거 같은 느낌도 들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현은 이에 앞서 이런 말도 했다. "갑작스레 4강에 올라가서 어느 정도 목표를 세워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하겠다." 지난 쇼미 더 스포츠 74화 [지난 화 바로가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랜드슬램 4강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업이다. 빅4(페더러, 라파엘 나달, 조코비치, 앤디 머리)의 위세가 지난 10년 동안 너무나 굳건했던 세계 남자 테니스계에서 그랜드슬램 4강 진출은 빅4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적인 선수들에게도 바늘구멍에 소가 통과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25세 미만의 소위 정현 또래 선수들 중에서 4강을 경험한 선수는 총 3명(정현, 카일 에드먼드, 도미니크 팀)에 불과하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21세 청년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 첫 단추가 메이저 대회 4강이었으니 남자프로테니스투어(ATP) 250 정도 대회에서의 우승은 성이 안 차는 건 아닐까 해서 사실 걱정이다.

하지만 테니스에서 그랜드슬램에서 우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대회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한 진부한 수식어가 아니며, 지난 10년간의 기록들이 보여주는 데이터가 그러하다. 2008년 호주오픈부터 2017년 US오픈까지 총 40번의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자가 탄생했지만, 실제 트로피를 받은 선수는 총 7명에 불과하다. 이 중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총 32번 우승을 자지했다. 빅3가 전체 우승의 80%를 차지한 것이다. 여기에 머리와 스타니슬라스 바브링카(각각 3회)를 합하면 40번의 메이저 대회 중에 5명의 선수가 95%인 38회를 우승했다.

메이저 스포스 종목 중 이만큼 소수에 집중된 과점 현상이 있는 종목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테니스와 가장 많이 비교되는 개인 프로 종목인 미국프로골프(PGA)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PGA투어는 같은 기간인 지난 10년 동안 40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30명의 우승자를 배출했다. 2회 이상 우승자는 7명이지만, 가장 많이 우승한 로리 매킬로이가 4회, 조던 스피스가 3회에 불과해 나달(13회)과 조코비치(12회)의 테니스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매일경제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4강전에서 정현(오른쪽)이 기권을 선언한 뒤 로저 페더러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정현은 진통제 투혼에도 발바닥 부상이 심해져 경기를 포기했다. /사진=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말하는 이변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프로테니스, 특히 그랜드슬램 대회는 이변이 가장 적게 일어나는 스포츠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번에 페더러에게 패한 마린 칠리치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인 2014 US오픈 당시 칠리치의 세계랭킹은 16위였으며, 칠리치의 우승이 지난 10년간 최고의 이변이었다. 반면 골프나 다른 종목에서 이보다 낮은 랭킹의 선수들이 우승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칠리치는 이미 US오픈 우승 휠씬 이전인 2010년 세계랭킹 9위를 기록한 바 있는 세계적인 선수다.

이런 현재 세계 테니스계의 환경을 정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때문에 아직은 메이저 우승이라는 말을 쉽게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빅4도 언젠가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빅4는 지난 10년간 굳건해 보였지만, 각기 다른 시기에 이런저런 부상으로 일정 기간 투어를 비운 경험들이 있다. 게다가 빅4의 맏형 격인 페더러는 30대 후반으로 현역 커리어의 종착점이 그리 멀지 않은 상태이며 페더러, 조코비치, 나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승 경험이나 임팩트가 작았던 머리는 부상에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또 전성기의 자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가 있는 게 사실이다. 조코비치와 나달의 나이를 감안하면 빅3 내지 빅4의 시대가 앞으로 길어야 3~5년 정도가 될 것을 예상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를 감안하면 정현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기회는 본인의 언젠가는 분명히 올 것이며, 동년배 중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작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지금의 '남자 테니스 빅4와 함께 살고 있고, 그들의 경기를 라이브로 볼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의 큰 행운임을 감안하면, 이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좀 더 많이 그들과 붙고 더 강하게 몰아붙이는 정현을 보고싶다.

잠깐, 미국 미식축구 슈퍼볼 얘기를 좀 해보자. 한국시간으로 5일 제52회 슈퍼볼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필라델피아 이글스가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MVP는 주전 쿼터백 카슨 웬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닉 폴스가 뽑혔다. 닉 폴스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한 차례도 주전으로 풀시즌을 뛰지 못한 선수다. 그런 그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수차례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자신들이 분명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반복한 단어는 다름 아닌 자신감(Confidence)이었다.

정현 또한 막연히 그랜드슬램을 제패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감이 생겼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점이 나를 들뜨고, 기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큰 행운이라는 것을 머지않은 미래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