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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이슈 [연재] 매일경제 '쇼미 더 스포츠'

1박2일 연장전서 패한 박인비가 위대한 선수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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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 미라지에서 막을 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자 페르닐라 린드베리(32·스웨덴, 왼쪽)가 준우승한 박인비(30)를 끌어 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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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더 스포츠-83] 박인비가 1박2일간, 무려 7차 연장전을 치렀지만, 아쉽게 시즌 2승 도전에 실패했다. 우승했다면 자신의 LPGA 통산 20승이자 메이저대회 8승을 달성하는 것이었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하지만 이번 ANA인스퍼레이션은 아이러니하게도 1위가 된다는 것, 특히 메이저에서 우승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대회였다.

박인비보다 메이저대회에서 많은 우승(7승)을 거둔 선수는 LPGA를 통틀어 5명에 불과하다. 이 중 '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을 제외한 4명은 모두 1935년 이전에 출생한 선수들이다. 현역 선수들 중 박인비보다 많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는 없다.

*여자골프의 전설들이 과거 세운 기록들에 대해 폄하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선수층이나 대회 규모면에서 지금과 과거의 기록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이다.

박인비는 LPGA의 역사를 쓰는 레전드 선수들 중 하나이다. 명예의전당에도 최연소로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비의 기록들은 다른 골프레전드스타들에 비해서는 조금은 평범해 보인다. 그녀가 대단한 선수인 건 분명하지만, 여자프로골프 역사에서 그녀보다 더 좋은 기록을 냈던 선수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여제' 소렌스탐은 메이저 10승을 포함해 72승을 거두었다. 여기에 LPGA 외의 프로골프대회에서도 20번 이상 우승해 총 승수는 90승이 넘는다. 오초아는 세계랭킹 1위를 무려 3년(158주) 이상이나 지켰고, 박인비 이전에 신지애가 이미 아시아 선수로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바 있다. 또 LPGA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한국선수는 여전히 박세리(25승)이다. 역대 한국선수 프로대회 최다승 기록(50승)은 신지애가 가지고 있으며, 각종 LPGA 최연소 타이틀은 리디아 고의 것이다.

메이저대회 그랜드슬램 기록도 2015년 박인비가 달성하기 전에 이미 6명이나 달성했고, 현재 박인비가 도전 중인 슈퍼그랜드슬램(메이저 5개 대회 우승) 또한 이미 캐리 웹이 2006년에 달성한 기록이다. 게다가 박인비는 막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한국(KLPGA)에서는 단 1승도 없다. 한국선수로 한미일 대회 모두를 제패한 선수가 수두룩한 점을 감안하면 조금 의외다.

그러나 여자 골프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할 수 있는 소렌스탐이 은퇴한 후, 지난 10년간 현대 여자프로골프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선수를 꼽는다면 단연 박인비다. 박인비는 지난 10년간 총 19승을 기록하며 가장 많이 우승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LPGA를 뛰고 있는 선수들 중 크리스티 커와 로라 데이비스가 20승으로 박인비보다 많은 승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은 박인비보다 10~20년 먼저 데뷔했다. 지난 10년간의 승수에서 박인비를 뛰어넘는 선수는 현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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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가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의 미션 힐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시즌 첫 메이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ANA 인스퍼레이션 대회 마지막날 연장 17번홀에서 벙커샷을 하고 있다. 박인비는 전날에 이어 8차까지 가는 연장전 끝에 페르닐라 린드베리(스웨덴)에게 패해 아쉬운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쳤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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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소위 '큰' 무대라 할수 있는 메이저대회에서 박인비의 활약은 실로 엄청났다. 2008년부터 지난 10년 동안 치러진 총 45번의 메이저대회에서 박인비는 전체의 15%인 7번을 우승했다. 같은 기간 중 박인비를 제외하고 27명의 메이저챔피언이 있었지만 이 중 2번 이상 우승을 한 선수는 7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박인비는 4년에 한 번씩만 열리는 가장 희소성이 높은 대회라 할 수 있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지난 120년간 남녀 통틀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골든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인비가 더욱 대단한 사실은 박인비의 활약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2015년 그랜드슬램 달성 이후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지만, 박인비는 사실상의 복귀전이나 다름없었던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다시 매년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비가 소렌스탐을 비롯한 LPGA 전설들의 기록을 깨는 것은 냉정하게 볼 때 조금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박인비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세계여자 골프계를 평정했던 청야니가 5년간의 짧은 전성기 후에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졌고, 오초아 또한 전성기가 6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년 이상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는 박인비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박인비가 청야니나 오초아보다는 소렌스탐이나 캐리 웹의 길과 더 가깝게 걷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소렌스탐은 커리어 우승 72승 중 68%인 49승을 만 30세 이후에 이루었다. 또 메이저 우승도 8번이나 기록했다. 캐리 웹 역시 30세 이후에 메이저 1승을 포함해 11번이나 우승했다. 1988년생인 박인비는 아직 만 30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

소렌스탐과 박인비 간 메이저대회 승수 차이는 3승이다. 박인비가 '여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앞으로 2~3년이 중요할 것이다. 소렌스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선수인 이유는 현대골프에서 그녀만큼 메이저 대회에 강했던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렌스탐은 출전한 메이저 57개 대회에서 10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출전 대회 수 대비 우승 비율이 15%를 넘는 선수는 소렌스탐과 박인비가 유이하다. 박인비가 향후 2년 내에 3승을 더 추가하면 소렌스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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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가 이 기간 중에 에비앙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해 슈퍼그랜드슬램까지 이룬다면, 명실상부한 레전드 선수가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올 거라 속단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그냥 팬으로서의 단순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그리고 다음 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고 골프이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박인비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해내 왔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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