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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이슈 [연재] 매일경제 '쇼미 더 스포츠'

수천명 눈물 속 떠나간 카자흐스탄 피겨영웅 데니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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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현지시간) 오전 8시 30분께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집을 떠난 운구 행렬은 오전 10시께 고인이 평소 피겨 스케이팅 연습을 하던 시내 발라샥 스포츠 센터에 도착했다. /사진=알마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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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더 스포츠-106] 지난 주말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 데니스 텐의 영결식이 열렸다. 그에게는 집과 같았던 알마티 발라샥 스포츠센터에는 5000명이 넘는 추모객이 모여 눈물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곳 카자흐스탄은 그가 7년 전 가장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커리어 첫 국제대회 금메달을 따낸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의 주인공은 단연 여자 싱글의 김연아였다. 2010 밴쿠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는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4년 만에 세계선수권 1위를 탈환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직전 시즌 세계선수권을 제패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징조이고 다음 시즌 소치올림픽의 여왕 김연아를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연아가 올포디움이라는 환상적인 커리어를 자랑하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년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생각만큼 많이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자 싱글의 주인공은 1위를 차지한 패트릭 챈이 아니었다. 패트릭 챈은 당시 남자 싱글의 최강자로 이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러시아의 알렉세이 야구딘(1998~2000년) 이후 13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를 3연패한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리무대에서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한 번은 손을 빙판에 짚었다. 반면 2위를 차지한 데니스 텐은 완벽한 점프와 착지를 선보이며 챈을 압도했다. 비록 쇼트에서의 점수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챈에게 불과 1.3점 뒤진 총점 266.48로 아쉽게 2위를 차지했지만, 그날의 주인공이 텐이었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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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피겨 스케이팅 영웅인 한국계 데니스 텐이 2017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그랑프리 '로스텔레콤컵' 대회에서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펼치고 있다. 카자흐스탄 언론은 데니스 텐이 알마티의 거리에서 자신의 승용차 백미러를 훔치는 범인들과 난투극을 벌이다 흉기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지난 19일(현지시간) 숨졌다고 보도했다. /사진=알마티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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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1년 뒤 소치올림픽에서 데니스 텐의 잠재력은 또 한 번 터지게 된다. 남자 싱글에서 하뉴 유즈루와 챈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텐의 동메달은 큰 의미를 지니는데, 피겨 남자 싱글에서 일본 선수가 아닌 선수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아시아 선수는 텐이 최초이며, 아직까지도 유일하다.

*2014 소치올림픽 남자 싱글은 중국계인 패트릭 챈을 포함해 동양인 3명이 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올림픽 대회였다.

물론 다소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늘 그러하듯이 쇼트에서 경쟁자들에 비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던 텐은 프리에서는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3위에 그쳤다. 하뉴와 챈이 프리무대에서 연거푸 실수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웠다.

*김연아가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올림픽 2연패를 목전에 두고 2위에 그쳤던 바로 그 대회다.

사실 텐은 항상 압도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조금은 투박하고, 대회나 시즌마다 기복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있는 편이었다. 일부 피겨팬들은 그의 경기력에 대해 농담으로 '한 시즌에 한 번만 날아다닌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한 시즌에 한 번만 날아다니는 것도 피겨에서는 대단한 일이다. 빙상, 특히 피겨는 다른 스포츠 종목에 비해 환경과 여건이 잘 뒷받침되어야 하는 종목이다. 그래서 소위 '피겨 강국'이라는 말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저변 또한 넓지 않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북미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 정도만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김연아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있어 점차 저변도 확대되고 팬들도 많아졌지만, 아직도 다른 피겨 선진국을 따라잡기에는 갈 길이 먼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데니스 텐은 한국의 김연아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카자흐스탄의 영웅이다. 비록 대회에서 성과는 김연아에 많이 못 미쳤지만, 그의 조국 카자흐스탄 내에서의 상징성은 김연아 못지않다.

1991년 말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내왔다. 세계 9위 면적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2000만명이 채 안되지만 올림픽에서 꾸준히 메달을 따내고 있다. 특히 복싱과 육상, 역도 등 하계 종목에서는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한 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동계 종목에서는 크게 두각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유일한 멀티메달리스트이자 국민 영웅이라 할 수 있는 크로스컨트리의 블라디미스 스밀로프(금1, 은2, 동1)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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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데니스 텐의 2014 소치올림픽 동메달 입상은 카자흐스탄에서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는 역대 75명의 메달리스트가 있었지만, 메달을 배출한 나라는 금은동을 모두 합쳐서 15개국에 불과하다.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카자흐스탄이 유일하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아주 큰 일이다. 게다가 텐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토박이였다. 텐의 올림픽 메달 획득은 단순히 쉽지 않은 일을 넘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 점프해야 할 시즌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더욱 아쉽고 많은 피겨 스타들도 눈물로써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세상은 늘 사람들 바람대로 되지 않고,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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