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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더 스포츠-107] 공 하나 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다. 리그 최고 타자이자 최고 몸값 선수 중 한 명인 최형우와의 대결은 사실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불안감을 주는 상황이었다. 최형우는 삼성의 전성시대에 수많은 우승을 함께했던 권오준의 후배다. 그러나 리그 최고 수준의 왼손 타자와 39세의 노장 사이드암 우완 투수 간 맞대결은 무게추가 조금은 기우는 승부였고, 다음 타석에는 양의지와 타율 1위를 놓고 다투고 있는 안치홍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권오준은 이미 8회에도 나왔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투수를 교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김한수 감독과 삼성 코칭스태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날과 전전날 많은 불펜투수진이 소모된 게 주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최고참 투수가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기회를 주고 싶었고, 그가 해내는 것을 팬들과 선수단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이지는 못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확률과 가능성을 계산해서 모든 일을 판단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권오준이 해내는 모습을 가장 보고 싶어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최형우 또한 집중했다. 끈질기게 승부했고, 6구에 타격했다. 평범해 보이는 내야 땅볼을 2루수가 실책했고, 순식간에 주자 1·2루 상황이 되며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할 수 있는 세이브 기록이 눈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야구에서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날도 그래 보였다.
하지만 권오준은 노련했다. 아니 꼭 승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자신의 직구로 리그 최고 타자이자 이날 홈런을 기록한 바 있는 안치홍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헛스윙 삼진으로 그를 돌려세우며 권오준은 포효했다. 누군가는 평범한 1승의 마무리 장면으로는 지나치게 '오버'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한국시리즈 마지막 무대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주는 순간이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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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3월생, 1999년 삼성 입단. 권오준은 1990년대에도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다. 그다음 날 선발이었던 양창섭이 1999년생이니, 그가 삼성에 입단한 후에 태어난 셈이다. 시작은 화려했다.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지명돼 삼성에 입단했다. 시속 150㎞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 유망주였다. 당시 KBO리그는 임창용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제2의 임창용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많은 유망주들이 그렇듯이 팔꿈치가 고장났고, 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세 번째 중 첫 번째 수술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권오준은 군복무를 조기에 해결하기 위해 20세에 입대했다. 두고두고 회자되지만, 그는 해병대 출신이다. 상무나 경찰청이 아닌. 해병대 출신 프로야구 선수라는 점은 멋진 스토리텔링이다. 하지만 권오준은 이것에 대해 과장도 이용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상근예비역으로 복무기간 후반기에는 출퇴근했다고 늘 솔직히 얘기했다. 다른 동기들보다는 그래도 편했던 만큼 해병대 출신이라고 괜히 과대평가받는 것에 대해 쑥스러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군생활이 특별히 편했던 것 또한 아니다. 군대는 군대이고, 해병대는 해병대다. 권오준은 이 기간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많은 준비를 하고 성장했다고 회상한다.
2003년 6월 3일 대구 KIA 타이거즈전에서 입단 4년 만에 꿈에 그리던 1군 무대를 밟는다. 13경기 23이닝 평균자책점 3.13.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리고 권오준은 그해 시즌을 마치고 정말 지독하게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삼성의 전지훈련지인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 가장 늦게까지 뛰었던 선수는 늘 권오준이었다. 당시 투수코치인 선동열 현 대표팀 감독의 숙제를 가장 잘 해낸 선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땀들은 그해 가을 결실이 되어 돌아왔다.
2004년 47경기에서 나와 11승 5패 2세이브 7홀드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모두 리그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중고'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그해 가장 빛나는 신인이었다. 각종 언론사에서 시상하는 신인상도 많이 수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해 KBO 공식 신인상은 현대 유니콘스 오재영에게 돌아갔다. 팬들도 많이 아쉬워했지만 늘 그러했듯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5년 상반기 권오준은 무적의 마무리였다. 시즌 초부터 삼성 불펜의 '원조' 끝판왕이었다. 6월 4일까지 팀의 마무리로서 10세이브를 넘게 하는 동안 32.2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선동열의 49.2이닝에 근접하는 기록으로 당시에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까지 그의 평균자책점은 0이었고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모든 것이 거칠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또 운이 따르지 않았다.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투구 밸런스는 깨졌다. 그해 삼성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무대 주인공은 오승환이었다.
비록 주연에서는 물러났지만, 권오준은 여전히 삼성 마운드의 핵심이었다. 오승환과의 'KO펀치', 권혁과의 '쌍권총' 등 삼성의 최강 불펜 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시대가 길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또 부상이 그를 붙잡았다. 권오준은 2008년 두 번째 팔꿈치 수술, 그리고 2013년 세 번째 팔꿈치 수술을 한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팔꿈치인대 접합수술 '토미존 서저리'를 3번이나 받은 것이다. 게다가 세 번째 수술 후 재활 중에는 불의의 사고로 팔이 골절되는 사고까지 당했다. 그때 권오준의 나이 이미 35세였다. 이쯤에서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권오준은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 불펜의 필승조는 아니었고, 강력한 속구도 없었지만, 자신의 역할을 꿋꿋이 해내며 몰락한 왕조를 지켜냈다. 올해로 데뷔 20년이 된 권오준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가장 오랫동안 뛰고 있는 선수다. 지난해에는 기어코 FA 자격 요건을 채워 소속팀 삼성과의 FA계약에 성공했다. *권오준은 데뷔 이후에 FA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선수다(FA 자격 조건은 통상 9년이지만, 권오준은 FA 자격 요건을 갖추기까지 무려 19년이나 걸렸다).
그의 나이 이제 39세다. 임창용이 여전히 뛰고 있고 입단 동기인 정성훈과 이진영 그리고 손시헌도 그라운드에 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권오준은 팀의 상승세를 잇는 소중한 세이브도 기록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1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이 변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시련의 시기를 권오준은 이겨냈고, 그의 야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권오준이 언제 또 세이브를 할 수 있을지, 그런 날이 과연 올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그는 내일 또 공 하나 하나에 혼을 담아 던지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한 거 같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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