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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미디어와 전문가의 공생, 지금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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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미디어 속 전문가들

방송에 등장하는 유명 ‘전문가’들

해당 분야 지식이나 전문성보다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느냐에 점수

어이없는 주장, 잘못된 사실 말해도

시청자 “설마 검증하겠지” 믿어

미디어가 검증 의무 게을리하며

전문가·언론 전체 불신 높아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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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도 없이 ‘전문가 패널’ 자격으로 티브이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지 넉달째가 됐다. 시청자 옴부즈맨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을 대표해’ 이야기를 푸는 게 내가 맡은 역할인데, 가끔 미처 모니터링을 열심히 못 한 프로그램을 다룰 때면 긴장감에 승모근이 귓불까지 솟아오른다. 물론 같은 일을 10년 넘게 하면 자연스레 쌓이는 게 있으니, 잘 모르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적당히 아는 척 떠들 재주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직업윤리가 그 지경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며칠 밤을 새워가며 밀린 회차를 모니터링한다. 매번 눈 밑에 다크서클을 지워주는 분장실 스태프들의 손끝에 축복 있으라.

잘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붙이다 보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2016년 오티브이엔(O tvN) <어쩌다 어른>에 출연해 동양화가 이양원 전 교수의 그림 <군마도>를 오원 장승업의 <군마도>라고 소개하며 장승업의 뛰어난 필력을 보라고 열변을 토한 최진기 강사라고 어디 처음부터 그랬으랴. 사회와 경제에 관해 유창하게 ‘썰’을 풀면서 인지도를 쌓다가, 논하는 분야를 인문학 전반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구글링으로 찾은 정보만 가지고도 방송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겠지. ‘미디어가 검증한 전문가’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의 누적치를 믿고 기용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꾸로 미디어에 기용되었던 경력이 이 사람의 지식과 전문성을 담보하는 증거가 된다.

‘미디어가 검증한 전문가’라는 함정

설령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이 보면 턱도 없는 주장들을 늘어놓아도, 미디어를 소비하는 평범한 시민 입장에선 ‘미디어에 나온 사람인데 설마 허튼소리 하겠어?’라고 믿게 되는 이 기괴한 마법. ‘미디어가 검증한 전문가’라는 함정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폭넓은 대중을 상대하는 미디어는 그 속성상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췄는가’보다는 그 지식을 ‘얼마나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럴싸한 화술이나 사람을 매혹시키는 신체언어 등을 갖춘 사람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아무리 틀린 정보를 전달해도 미디어 노출을 통해 얻은 권위 때문에 전문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이들은 드물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자연스레 “그분이 틀린 정보나 전하는 사람 같으면 미디어에서 그렇게 계속 썼을까요? 진작에 검증에서 탈락했겠죠?”라는 반박이 돌아온다.

“미디어에서 전문가로 유명한 사람이니 틀린 말을 안 할 것이다”라는 논증,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의 여부나 거짓말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해온 숭실대학교 배명진 교수는 문화방송(MBC) <피디수첩> 제작진이 그의 연구를 검증하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자신은 25년 전문가이기 때문에 방송이 자신을 검증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인터뷰를 거절하며 격분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노벨상 받을 일도 하고 있어요. 그런 정도로 과학적 연구를 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런 입장인데. 저를 비토(veto) 하는 사람이 없겠어요? 난 그런 데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도식화하자면 이런 논리다. ‘나는 전문가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유명해져도 좋을 만큼 전문가인지 여부는 검증할 필요가 없다.’

비슷한 논증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자신의 개인 유튜브 방송에서 감칠맛에 대해 논하다가 그만 “디엔에이(DNA)도 단백질”이라는 희대의 발언을 남겨 전국 과학도들의 헛웃음을 자아낸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또한 자기주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인터넷에 올라온 익명의 악플러의 말과 지식시장에서 검증된 실명 전문작가의 말을 대등한 것처럼 실어주는 한국 언론 종사자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검증을 회피하기를 반복했다. 말인즉슨 자신은 오랫동안 지식시장에서 살아남으니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글쎄, 미디어로 얻은 유명세와 지식시장 내의 평가가 늘 같이 가는 건 아니다. 조작한 줄기세포 논문을 발표한 황우석 박사조차 미디어가 그를 확고한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어준 탓에 검증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가?

도올, 중국 일당제 호평 논란에 이어…

설령 ‘미디어가 검증한 전문가’가 잘못된 사실을 주장하다가 실책을 범하더라도 미디어는 그들을 다시 기용하곤 한다. 미디어가 높게 사는 능력은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2016년께부터 2년간 책과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에 대한 호평을 주장해온 도올 김용옥 교수를 보자. 도올은 2016년 제이티비시(JTBC) <차이나는 도올>을 통해 “다당제보다 때로는 일당제가 민주적일 수도 있”다는 엄청난 주장을 던졌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로 세월을 보내는 다당제보다 민심에만 집중하면 되는 일당제가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2017년 시진핑 주석이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후계자를 지명하는 일 없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을 때, 도올은 교통방송(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국내 언론을 향해 “일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우리가 그냥 번역하면서 고스란히 베낀 보도”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2018년 시진핑이 자신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개헌을 셀프 승인했을 때, 그가 한 해명이라고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시진핑이 진짜로 개헌할 줄 몰랐다”고 말한 것 정도가 전부다.

중국의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다가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수감된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아예 대리 수상도 못 하도록 류샤오보의 모든 친인척과 인권운동가 수백명을 출국금지시킨 2010년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그 앞에서 차마 “다당제보다 때로는 일당제가 민주적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국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한 적 없는 평범한 생활인조차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언론들을 향해 “일본 언론 받아쓰기”라며 감정적인 비난을 하던 이가, 자신의 지적 오류에 대해 책임을 지는 대신 2019년 새해가 밝자마자 공영방송에 출연해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강의를 시작한다.

한국방송 <도올아인 오방간다>의 첫 회, 그는 임시정부의 의의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왕조가 끝나는 순간까지 한국인들은 왕에게, 어떻게 했어요? 충성하고 복종했죠. 그리고 아쉬워했죠. 그렇게 1910년까지 우리는 완전한 왕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9년 만에 임시정부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대한제국 말기, 백성이 입후보해 선출한 민선 의관이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독립협회는 지속적으로 중추원을 근대적인 의회로 발전시키려 했다는 역사적 맥락 같은 건, “완벽한 왕정에서 불과 9년 만에 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는 도올의 유려한 서술 안에서 증발한다.

엉뚱한 그림을 오원의 그림이라 상찬하던 사회학 전공자 최진기는 방송에 다시 출연해 인공지능에 대해 논하고, 2년 가까이 시진핑을 위대한 지도자라 말하던 도올은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을 강의한다. 이런 일이 한두번 벌어진다면 그건 잘 모르는 걸 아는 척한 전문가들의 탓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결국 그 책임은 신문과 방송에 있는 게 아닐까?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릴 미디어 종사자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들에겐 콘텐츠를 송출하기 전 자신들이 섭외한 소위 ‘전문가’가 정말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지, 그의 주장에 오류는 없는지 검증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 물론 모든 전문가가 매력적으로 ‘썰’을 잘 풀 수 있는 건 아니고, ‘썰’과 지식을 모두 갖춘 전문가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검증을 게을리하며 말 잘하는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인증해준 결과, 사람들은 이제 전문가 집단 전체를 불신하고 언론을 향한 신뢰를 잃었다. 늘 언론의 위기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이렇게 여유있어도 되는 걸까?

티브이 칼럼니스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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