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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진심으로 친구로 남으면 좋겠어”…“넌 가짜 모습을 믿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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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 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기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싶은 게 있어요. 어딘가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고향도 서울도 아닌 제3의 도시로 가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경력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말이죠. 힘든 일도 있겠지만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멋진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좋았던 것, 힘들었던 것 다 지워버리고 가뿐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어쩌면 그냥 이쯤에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에서 ‘뿅’ 하고 사라져버리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감독 에마뉘엘 카레르·2024)를 보면서, 나만의 ‘두 세계’를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시작, 다른 전개, 다른 결말을 기대하면서.



파리에서 살던 저널리스트 마리안(줄리엣 비노쉬)은 어느날 ‘캉’이라는 도시로 이사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기 시작해요. 목적은 실업률, 고용 불안정 등 막연한 추상명사로 접하던 경제 현실을 몸으로 부딪쳐 경험해보겠다는 거였어요. 그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마리안은 대학입학 자격시험(바칼로레아)을 취득한 이후의 경력을 전부 지우고 간단한 서사를 만듭니다. 결혼해서 주부로 살다가 이혼해 혼자가 됐고 아이는 없다는 식으로. 꾸밈을 지운, 퀭한 얼굴은 정말 그런 처지인 듯 보여요.



이력서상 경력이 전무한 마리안에게 고용상담원이 추천하는 일자리는 ‘유지관리’ 담당자였어요. 청소부란 얘기죠. 마리안은 유지관리 업계에서 시간제 임시직으로 밑바닥 노동 시장 체험을 시작해요. 얼마 동안 할지는 몰라요. 하지만 정규직이 되는 순간 그만둬야 한다고는 생각했어요(그 일자리가 절박한 사람에게서 기회를 뺏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이 경험을 책으로 써서 비정규 노동으로 생계를 지탱해나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가면서 새로 접하는 세계를 그녀가 어떻게 헤쳐나갈지, 어떻게 써나갈지 궁금했어요.



이력서를 복사해 고용박람회에 나가고, 업무 교육을 받고, 사람들과 현장을 찾아가는 등 청소노동자에 적응해나가는 마리안. 남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그녀가 캉에 와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하는 최초의 순간은 ‘유지관리 담당자’로 채용에 성공했을 때가 아니라 책의 집필 방향이 잡혔다고 느낀 순간에 나옵니다.





모든 걸 버리고 다른 세계로…“불가능”





심하게 공감이 되는 장면이었어요. 아, 그렇게 쓰면 되겠구나 하고 감이 오는 순간. 유레카! 그 기분 말이죠. 그 전까지는 안갯속처럼 계속 헤맨다죠. 과연 이걸 끝마칠 수 있을까, 어떻게 써나가야 할까,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온갖 생각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가 “어느 순간에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집중하면 된다고요. 마리안이 저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빛을 잃고 흐릿하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며 별처럼 반짝하던 그 순간 화면 밖의 나는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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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저 사람은 청소 노동자가 아니라 작가이지. 모든 걸 버리고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자 거짓말이구나, 그런 상태에서 새로 맺는 관계는 결코 온전할 수가 없겠구나…. 그렇게 해서 눈치채게 되었어요. 이 이야기는 논픽션을 쓰기 위해 신분까지 감춘 저자의 모험담이 아니라 진실과 진실에 다가가려는 사람, 그 관계맺음의 윤리를 다루고 있다는 걸요.



마리안이 들어간 노동의 밑바닥 세계에서 그녀를 향해(그녀가 써내려가는 책의 주인공으로) 걸어 나온 이는 아들 셋을 키우며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크리스텔(헬렌 랑베르)입니다. 일거리가 있을 때는 일을 하고, 없으면 고용상담센터를 찾아 실업수당을 신청하고, 받았던 교육을 다시 받아요(그래야 실업수당이 나온대요). 마리안은 크리스텔과 위스트르앙 부두에서 영국행 페리의 객실 청소를 같이 하면서 가까워지는데요. 하루에 세 차례 배가 오는 시간에 맞춰 달려 들어가 한 시간 반 만에 60개의 객실 청소를 마치는 일입니다. 일감 없는 비는 시간에 쉴 곳이 제공되지도 않는 데다 출퇴근 버스도 없어서 그야말로 업계 최고 노동조건으로 악명 높은 일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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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 한참 선배이지만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차가 없어요) 크리스텔은 마리안의 차로 카풀을 하면서 점점 표정이 부드러워져요. 그러나 한편으론 마리안의 행동에 이질감을 느끼죠. 크리스텔이 속한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랄까요. 함께 퇴근하는 길, 마리안이 평소와 다른 길로 달리자 크리스텔이 물었어요. “왜 이 길로 가요?” “드라이브도 하고 좋지요. 저 나무 두 그루, 서로 얘기하는 것 같지 않아요? 멋지지 않아요?” 크리스텔은 답이 없었어요.



어느날은 오전과 오후 근무 사이, 빈 시간에 해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화면에 잡힙니다. 마리안은 바닷가에 널브러져 한껏 휴식을 취하는데 크리스텔은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죠. 크리스텔은 마리안의 행동이 낯설었어요. “나는 이럴 시간이 없어요”라고 하지만, 마리안은 같이 수영하지 않겠냐고 묻고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요. 다음 번에는 크리스텔의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같이 모래성을 쌓고 실컷 놀아주기도 하죠.



노동과 노동 사이에서 늘 긴장하고 있는 크리스텔과 어떤 상황에서도 멋과 여유를 찾아내고 빈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줄 아는 마리안의 대비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마리안은 그런 방식으로 크리스텔을 도와주려 한 것 같아요. 같은 조건, 같은 상황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슬픔을 적절히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하지만 마리안이 “진심으로 우리가 친구로 남고 싶다”고 했던 날, 마리안의 비밀이 깨어지고, 크리스텔과 마리안의 우정도 금가고 말았어요. 마리안과 크리스텔이 함께한 시간들의 의미도 산산이 부서지고 말지요. “그래도 우리 우정은 진짜”라고 마리안은 애원하듯 말하지만 크리스텔은 더 화를 내요. “당신의 가짜 모습을 믿게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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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삶의 이력을 새롭게 써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어요. 낯선 곳에서 새로 관계를 맺어갈 사람들에서 과거를 지운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싶어요. 거꾸로 내가 있는 세계로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다가온다면 어떨까 생각하게 돼요.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 시작해보겠다는 발상은 또한 얼마나 이기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요. 그건 누군가에게 기만이고 위선일 것 같아요. 그런 기만과 위선은 상대적 약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요. 그들은 자신의 치욕과 슬픔을 적절히 표현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치유하기 어렵고, 상처의 그늘은 깊어질 수밖에 없어요.



마리안과 우정을 쌓으며 따뜻한 미소가 번져가던 크리스텔의 얼굴이 영화의 끝에선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이유에 관해 당신과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비정규 임시 청소 노동자의 팍팍한 현실로 들어갈 때보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책을 출간하고 겪는 마리안의 고통이 더 깊게 느껴지는 까닭에 대해 더 충분히 이야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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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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