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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매일경제 '쇼미 더 스포츠'

오사카 나오미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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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더 스포츠-148] 테니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생활스포츠로서 테니스의 가치는 매우 높다. 하지만 한편으로 테니스는 진입장벽이 높은 스포츠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가장 먼저 프로화된 개인스포츠 중 하나이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철저하게 서구 백인 중심으로 운영됐다. 백인이 아닌 선수들이 세계 테니스의 중심부에 진출한 것은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무척 어색하고 드문 일이었다. 특히 아시아(계) 선수가 테니스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활약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1989년, 175㎝ 단신 동양인 선수가 프랑스오픈 4회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이반 렌들과 맞붙는다. 이미 프랑스오픈에서만 세 번 우승한 렌들과 17세 중국계 미국인 소년과의 맞대결은 대결 자체로는 흥미로웠지만, 경기 예상은 좀 뻔했고, 첫 두 세트를 렌들이 가지고 갔을 때만 해도 그러했다. 하지만 코트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던 이 작은 소년이 이 후 두 세트를 따내고, 마지막 세트에서 이날 경기의 백미였던 언더서브로 렌들의 허를 찌르며 5세트마저 이겼을 때, 전 세계 테니스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이클 창은 이 기세를 몰아 결승에서 에드베리까지 물리치며 남자 테니스 최연소 그랜드슬램 타이틀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이루었다.

1989년 혜성처럼 등장한 마이클 창은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테니스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의 테니스팬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인의 피지컬과 체력으로는 세계 테니스계에서 명함을 내밀기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하지만 비록 미국 국적의 선수이지만 마이클 창의 활약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피해의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1989년 프랑스오픈 이후, 마이클 창의 활약은 팬들의 기대만큼 이어지지는 못했다. 17세에 차지한 그랜드슬램 첫 우승이 그의 커리어의 마지막 그랜드슬램 타이틀이 됐다. 이후 3번의 그랜드슬램 결승에 올랐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마이클 창은 2003년까지 활약하며 34개 투어 단식타이틀을 차지했고, 1996년에는 세계랭킹 2위에까지 올랐지만 끝내 최고가 되지는 못했다.

마이클 창 이후, 많은 아시아(계) 선수가 세계 테니스 중심에 도전했지만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2011년이 되어서야 중국 국적의 리나가 프랑스오픈에서 깜짝 우승했다. 1982년생인 리나는 29세 나이에 우승하며 남녀 통틀어 그랜드슬램을 제패한 최초 아시아 국적 선수가 되었다. 리나는 2014년 호주오픈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오르며, 세계랭킹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아쉽게 그해에 은퇴했다.

2014년에는 리나 외에도 또 하나의 대형 아시아인 테니스 선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일본 국적의 니시코리 게이이다 니시코리는 US오픈 결승전에 아시아 국적 선수로는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다. 아쉽게 칠리치의 벽에 막혀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현재까지 꾸준히 세계 톱랭킹(최고랭킹 4위)을 유지하며 활약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코치는 마이클 창이다.

2018년 마지막 그랜드슬램 대회인 US오픈 대회전 주인공은 단연 세레나 윌리엄스였다. 출산 이후 새로운 커리어를 준비하는 세레나에게 US오픈은 상징적인 대회였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나이키는 세레나를 위한 새롭고 특별한 의류와 신발 라인업을 공개했고, 세레나는 이에 화답하듯 결승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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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나오미(4위·일본)가 지난 23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여자단식 준준결승에서 엘리나 스비톨리나(7위·우크라이나)에게 포핸드 공격을 펼치고 있다. 오사카는 이날 스비톨리나를 2-0(6-4 6-1)으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사진=멜버른 AP, 연합뉴스


하지만 결승에서 세레나가 만난 선수는 만만치 않았다. 만 20세 어린 소녀는 세레나보다 키가 컸으며 때로는 더 강력한 파워를 뽐내며 경기를 압도했다. 세레나는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그녀가 간혹 그래왔듯이 상대가 아닌 또 다른 상대(심판)와 대결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그날의 경기가 온통 세레나에게 집중돼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일본 국적 20세 소녀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오사카 나오미라는 대형 선수의 등장이었다.

지난주 말,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호주오픈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전년도 마지막 그랜드슬램인 US오픈과 다음 시즌 첫 그랜드슬램 간 시차는 약 6개월이다. 그리고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사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희미한 기억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랜드슬램 두 대회 연속 우승. 2015년 세레나 이후 4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 그리고 마침내 남녀 통틀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아시아(계)인 최초의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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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나오미(22·일본)가 지난 26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의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막을 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여자단식에서 우승한 후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오사카는 이날 우승으로 오는 28일 발표되는 단식 세계랭킹에서 남녀를 통틀어 아시아 국적 선수 최초로 1위에 오르게 됐다. /사진=멜버른 AP, 연합뉴스


일본 국적으로 유니폼에 일본 기업(닛신식품, ANA)의 로고를 달고 뛰는 오사카의 아버지는 건장한 아이티인이다.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가 테니스를 배운 그녀에게 아직 일본어는 영어만큼 익숙하지도 않다. 더군다나 압도적인 피지컬과 강력한 서브는 팬들로 하여금 최초 아시아인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반감시킬지도 모르겠다. 사실 굳이 이에 대한 반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일본인이든 아이티인이든 미국인이든 그녀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 21세 나이에 3번의 커리어 우승 중에서 2번이 메이저대회 우승, 그것도 2번 결승 진출에 모두 승리. 오사카의 등장은 어쩌면 단순히 아시아인 그랜드슬램 우승이나 세계 랭킹 1위라는 수식어를 뛰어넘는 여자테니스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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