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섣부른 흑백논리는 품격있는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 사태가 급박하거나 사안이 위중할 경우 들끓는 여론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책임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차가운 머리를 잠재우고 뜨거운 가슴을 소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다보면 정부는 정교하고 치밀한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을 내놓기 보다는 급한 불을 끄려는 성급함 탓에 자충수를 두곤 한다. 흑백논리에 기반한 대책,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충격요법으로선 효과가 있겠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흐트리며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게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심석희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불이 붙은 ‘체육계의 미투’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어 걱정이다. 체육의 패러다임 변화라는 중대한 정책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체육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의 성급하고도 경솔한 발언은 그동안 한국 체육을 이끌었던 엘리트체육의 심장에 굵은 대못을 박는 역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도 장관은 지난 25일 “스포츠의 가치를 국위선양에 두지 않겠다”며 합숙 폐지, 소년체전 폐지, 병역특례와 연금제도 개선, 선수촌 전면 개방 등을 언급했다. 엘리트체육은 들끓었다. 유승민 IOC 위원은 자신의 SNS에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라며 발끈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한 체육인은 “엘리트체육 사망의 날”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체육개혁이 자칫 역풍을 맞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건 도 장관의 발언으로 체육이 돌연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갈등을 조장하고 획책하는 건 한국 체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도 좋지 않은 일인데 체육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문체부 장관의 입에서 경솔한 발언이 나왔다는 사실은 다소 부끄럽다. 하기야 체육을 바라보는 문체부의 편향된 시각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엘리트체육이 경기력에 매몰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한 측면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쌓아온 기적 같은 성과와 이를 위해 헌신한 체육인들의 노고마저 가치 없는 일이라고 매도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엘리트체육을 향한 문체부의 날선 시각은 지난 정권에서부터 쌓인 구원(舊怨)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체육단체 통합에서 불거진 문체부와 체육회의 갈등은 정권이 바뀐 뒤에도 계속 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두 조직 모두 이번 사태에서 함께 책임을 통감해야할 처지지만 약속이나 한듯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모양새다. 체육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에서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가치의 우월성을 따진다면 그건 천박하고 유치한 일이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나누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단행한 게 체육단체 통합이라면 모든 논의는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는 새로운 체육생태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도 장관의 발언으로 촉발된 엘리트체육계의 반발과 동요가 체육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비쳐져서도 곤란하다. 체육개혁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며 그 누구도 딴죽을 걸어서는 안될 신성한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상황에선 오해와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섣부른 레토릭(rhetoric)을 자제하고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라도 몇 가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선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사태 수습의 첫 걸음이다. 체육회를 사유화한 이 회장의 낡은 리더십으로는 더 이상 체육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는 게 체육계, 아니 국민의 공통된 바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체육계의 제반 모순구조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보다는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집중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KOC 분리, 진천선수촌 개방, 소년체전 폐지 등 체육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일체의 논의는 체육개혁이라는 급한 불을 끈 뒤 이어가도 결코 늦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논의 역시 관료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해줄 수 있는 체육인이 주도해야 함은 물론이다. 체육은 생각과 현장의 간극이 가장 큰 분야 중 하나다. 체육을 권력 투쟁으로 여기거나 정치적 프레임으로 접근했다간 낭패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체육은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 그리고 땀방울이 배인 발걸음이 합쳐져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까다로운 분야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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