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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47년 역사 소년체전 해체, 한국 스포츠 패러다임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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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국소년체전 폐지 논란

72년 시작 ‘스포츠 엘리트 육성’ 기획

도종환 장관 “체육축제로 개선” 발표

체육 통한 국위선양 목적 우선시

선수들은 수단으로 동원되는 현실

스포츠계 미투 시대 맞아 한계 봉착

국가-지자체-학교-시·도체육회 등

소년체전을 둘러싼 기득권 넝쿨

대한체육회 등서 폐지 반대 목소리

진학·병역 특례 등 개혁과제 수두룩

선수·학생 구분 없는 공생의 길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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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메달리스트 등 유명 선수의 회고담을 보면 “빵이 먹고 싶어서” “우유를 주니까” 등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시작한 이유가 나온다. 그 달콤한 유혹에 빠지거나 혹은 교사의 낙점에 의해 한국의 엘리트 선수들은 발굴되고 육성됐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정부가 엘리트 선수의 진입 제도로 기획한 전국소년체육대회(소년체전)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그 방증이다.



“100m 14초에 뛰는 놈 손들어 봐!”

“저요! 저요!”

과거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이런 풍경이 종종 펼쳐졌다. 수업 끝나고 책가방을 싸는 혼란스런 분위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체육부장 교사나 감독의 요청에 자랑하듯 손을 든 학생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얼떨결에 선수가 됐다. 육상만이 아니다.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이나 유도, 레슬링 등도 이런 식으로 선수를 발굴한다.

한국에서 학생이 선수로 바뀌는 과정은 독특하다. 좋아서 자발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권유나 낙점에 의해서 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라는 제도 공간에서 교사는 감별사 역할을 맡는다. 1972년 출범한 소년체전은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소년체전은 이제 사라질 전망이다.

소년체전→전국체전→국가대표 공식 ‘흔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에서 “소년체전을 폐지하고 전국체전 고등부와 통합하겠다”고 밝혔다. 또 “그동안 교실이나 학업과 유리돼 있었던 선수, 운동과 담을 쌓았던 학생 구분 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학생체육축제 형식으로 전환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소년체전은 엘리트 선수 육성을 위한 진입로 구실을 해왔다. 소년체전에서 입상한 선수들은 전국체전에 진출하고,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국제대회 경험을 거쳐 선수촌의 국가대표 정점에 오르는 게 공식이었다. 지역을 대표해 나간다는 선수들의 자긍심은 컸지만, 선수의 자기결정권 등은 차순위였다. ‘체육을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국가 기획이 바탕이 되면서 메달 획득이 지상목표였고, 선수들은 수단으로 동원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스포츠계 미투 고발과 공정성, 인권 등이 강조되는 시대 분위기 앞에 국가 주도 엘리트 체육 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소년체전이 단순히 선언만으로 폐지되지는 않는다. 또 소년체전을 없앤다고 한국의 스포츠 지형이 하루아침에 미국이나 일본식으로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소년체전을 둘러싼 문제들은 뿌리가 깊다. 지자체는 ‘작은 올림픽’이라며 도세를 과시하고, 교사는 선수 성취에 따라 승진 고과를 받고, 시·도 체육회는 선수 발굴을 꾀하는 등 각 이해집단의 기득권이 고구마 넝쿨처럼 얽혀있다. 체육특기자의 대입 방식 등 예민한 부분도 해결해야 한다. 오는 5월 전북 익산에서 열리는 48회 소년체전은 일단 기존 방식대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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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체전의 폐지 움직임은 한국 체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박정준 인천대 교수는 “그동안 소년체전이 교육부 주관 대회임에도 경기력 측면에서 우수 선수를 발굴하는데 집중돼 왔다. 이제는 교육적 관점에서 학생을 중심에 놓고 대회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한국 엘리트 선수의 운동 입문과 통로 구실을 했던 소년체전의 개혁은 학교 스포츠 현장을 많이 바꾸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년체전이 해체된다면 시·도 체육회의 기득권은 약화된다. 전국체전 개최지에서 이듬해 열리는 소년체전은 예산과 전문성이 부족한 교육청이 뒤로 빠지고, 대신 시·도 체육회가 중심이 돼 대회 운영을 맡는다. 이런 관계를 통해 시·도 체육회는 교육청에 비인기 종목의 선수 충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우수 선수 발굴과 육성 등으로 정부 재정지원을 받는 대한체육회도 소년체전이나 전국체전에서의 역할을 근거로 존립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학교 체육의 변화도 예상된다. 그동안 선수들은 초중등교육법의 관리를 받는 일반 학생과 달리 훈련이나 대회 참가를 이유로 수업에 빠질 수 있었다. 상급학교 진학 때 학군 제한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 일종의 혜택이다. 반면 초등학교 때 이뤄지는 선수 등록을 통해 운동 외길에 접어들게 되면 워낙 강도 높은 훈련 탓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도 체육계열 진학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기 힘들었다. 선수가 하나의 트랙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운동부에 가입·탈퇴할 수 있다면 일반 학생들의 스포츠 참여도 늘어날 수 있다.

체육 특기자 제도와 상급학교 진학, 포상 및 병역 특례 등에 대한 제도 개혁도 이뤄져야 한다. 체육 특기자의 대학 입시의 경우 고교 내신성적의 반영 비율은 매우 미미한 편이다. 일부 대학에서 내신을 반영하지만 실기점수나 면접에 비해 현격하게 적은 비중이었다. 이 때문에 초·중·고의 선수 최저학력제는 실효성이 떨어졌고, 오히려 전국대회나 체전 성적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부는 앞으로 대학 진학 특기자의 내신 반영을 높이고, 초·중·고 선수의 최저학력제를 내실화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기존의 관행이 하루 아침에 바뀌기는 쉽지 않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지난 25일 소년체전 폐지 계획뿐 아니라 메달리스트에 대한 병역특례나 연금제도 개선, 합숙훈련 축소와 선수촌 개방 등 체육계 개혁 방안을 언급하자 벌써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한체육회 노동조합과 산하 종목단체로 구성된 경기단체연합회의 노동조합은 지난 31일 “체육계 (성)폭력 사태에 대해 체육계 일원으로 무한한 책임을 통감하지만, 문체부 등 정부가 발표한 쇄신책은 현장을 전혀 모르는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올림픽 등 국제대회마다 선수단의 메달 수 등 국위선양 지표를 주도해 발표한 건 정부였다. 자기반성도 없이 3년 전 통합 대한체육회를 설립할 때처럼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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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체육 ‘백년하청’ 안 되려면

실제 현행 엘리트 스포츠 체육의 근간을 세운 것은 국가다. 문체부가 대한체육회를 통해 경기단체에 국제대회 성과 등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한 것도 사실이다. 정치권 또한 국제대회 메달의 성취를 정치적 위신이나 득표 활동에 이용하는 데 바빴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슈는 정치권에서 잘 나서지 않는다. 가령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의 커리큘럼이나 임용시험에서 체육의 비중은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체육계를 중심으로 제기돼 왔지만 공허한 외침이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스포츠 체험 기회를 넓히기 위해 정부가 체육대학 출신 스포츠 강사를 배치했지만 예산 등의 이유로 초기보다 인원이 확 줄었다. 2017년 대선 후보들이 체육인들 앞에서 약속한 “스포츠 강사의 정규직 전환”도 허언이 되면서 불신을 자초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체육의 엘리트 중심 패러다임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백년하청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류태호 고려대 교수(체육교육과)는 “국가가 정해 놓은 틀에서 열심히 땀 흘려온 선수들과 지도자의 노력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것도 명백하다. 다만 선수들이 인간으로 누려야 할 일상을 파괴당하면서 메달에 연연하는 시대는 마무리해야 한다. 과격하더라도 변화가 필요하고, 그것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후속 조처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더이상 강압적 훈련 문화를 고수하는 운동부에 아이를 맡길 부모는 많지 않다. 인기 종목인 축구, 야구, 농구조차 현장에서는 선수 충원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년체전 식의 선수 발굴 시스템이 스포츠 선수의 충원에도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스파르타식 훈련 문화와 지도자의 체벌에 대해서 묵인했던 학부모들의 의식도 달라지고 있다.

대한체육회도 “현재의 소년체전 형식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실제 소년체전이 한동안 중단되거나, 지자체별로 분산돼 열렸던 적도 있다. 다만 체육회가 할 수 있는 것과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고, 그런 부분에 대한 상호 조율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제도를 바꾸면 체육회는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최소한 정부와 현장의 체육인들이 만나 토론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는 얘기다.

당장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 포함된 고등부를 합쳐 클럽 축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직과 예산, 경기 운영방식, 시상식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모든 종목이 모여서 할 것인지, 아니면 종목별로 대회를 치를 것인지도 가려야 한다. 또 시·도간 치열한 경쟁이 아니라 축제로 만들어야 하는 만큼 다양한 교육적 체험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할지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정부가 주도해 만든 스포츠혁신위원회와 학교체육진흥회의 첫번째 과제는 이런 문제를 푸는 쪽으로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박정준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소년체전이 축제가 된다고 최선을 다해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의 기본 정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대회 출전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 되고, 그것 자체만으로 잘 살고,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학습의 역량’을 키우는 장이 돼야 한다. 갈수록 선수 자원이 부족해지는 상황에서 저변이 확대되면 대한체육회도 좋은 일이다. 선수와 학생이 구분되지 않고 선수가 곧 학생인 공생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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