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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funE ㅣ 김효정 에디터]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던 그.
9일 방송된 SBS 스페셜-'요한, 씨돌, 용현 1부'에서는 세 가지의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인생에 대해 조명했다.
강원도 정선 봉화치 마을. 청정 자연이 잘 보존된 이 곳은 사람 대신 동물들이 주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마을.
이 곳에 사는 배옥희 할머니는 80살이 된 나이에도 혼자 농사일을 했다. 옥희 할머니는 "씨돌 아저씨는 뭐든 다 도와줬다"라며 이웃사촌인 씨돌 아저씨에 대해 말했다.
지난 2012년 우리는 씨돌 아저씨를 이미 만났다. 7년 전 자연인 씨돌 아저씨를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던 '세상에 이런 일이'의 박소현, 임성은 씨는 그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에 임성훈은 "당시에는 자연인이라는 말이 생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씨돌 아저씨가 바로 원조 자연인이 아닐까 싶다"라고 했다.
과거 씨돌 아저씨는 '저절로 농법'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농작물을 키웠다. 그리고 맨발로 지게를 지며 "이렇게 하면 내가 진실하다고 할까"라며 느리지만 자기가 생각한 길을 갔다. 그렇게 3시간을 걸어 그는 한 종묘 가게에 가서 자신이 키운 농작물과 필요한 것들을 물물교환했다. 지게 한 가득 가지고 온 농작물과 그가 교환한 것은 씨앗 몇 개. 그는 씨앗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봉화치 마을 주민들은 씨돌 아저씨에 대해 "그 아저씨는 모두가 다 친구다. 동물도 친구고 다 친구였다"라고 그를 떠올렸다. 씨돌 아저씨를 처음 만났던 2012년 겨울에도 씨돌 아저씨의 동물 사랑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배 위에 곡식을 올려두고 눈 밭에 누웠다. 그리고 작은 새들이 날아와 곡식을 먹기를 기다렸다. 이에 씨돌 아저씨는 "재미 삼아 새들하고 촉감을 느껴보면 너무 좋다"라고 즐거워했다.
2019년 봉화치, 씨돌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그가 살던 집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4년째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것. 옥희 할머니는 "참 좋은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없으니까 동네가 텅 빈 거 같다. 어디에 가 있는지 소식도 없다"라고 했다.
이에 씨돌 아저씨의 소식을 찾아 5일장을 찾았다. 그곳 사람들은 "돌아가셨다는 말도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씨돌 아저씨의 흔적을 따라갔다. 서울의 한 시민 단체의 위원장은 "김씨돌 씨가 언제부턴가 우리한테 뭔가 보내주신다. 우리는 보물상자라고 부르는 거다. 완전 유기농인 농작물들이 보내졌다. 꽃을 보내주기도 한다"라며 밝혔다.
또한 시민연대 관계자는 "땅을 기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셨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만나봐야겠다 싶어서 김씨돌 씨를 찾았다"라며 "일관되게 이야기하신 게 있다. 자기는 돈을 갖는 게 무섭다. 활동가들을 위한 쉼터, 명상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주시겠다는 땅을 우리는 못 받겠다고 했다. 그건 우리 스스로 셈을 했던 거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자신이 없는 봉화치를 누군가가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 하지만 시민연대의 거절로 기부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가 사라진 집만 남았다.
봉화치 근처의 한 마을에 있는 성당에서 씨돌 아저씨의 소식을 또 들을 수 있었다. 관계자는 "세례를 받으셨다. 성당에서 그분 집에 가서 봉사활동을 상당히 많이 했다"라며 "김씨돌 씨가 글을 많이 썼다. 책을 내려고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내용은 얘기를 안 해주셨다"라고 말했다.
7년 전 우리가 만났던 씨돌 아저씨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어떤 내용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이 쓴 글과 함께 사라졌다.
씨돌 아저씨가 떠난 봉화치에는 봄이 찾아왔다. 옥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씨돌 아저씨를 그리워했다. 그는 조건도 이유도 없이 주변인들에게 모든 것을 베푼 사람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경북 포항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그때 홀로 웃지 못하는 임분이 할머니가 눈길을 끌었다.
임분이 할머니는 지난 1987년 상병으로 복무 중이던 막내아들 정연관을 잃었다. 그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쓰러졌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 정연관 상병의 사망 직후 가족들은 기이한 일들을 겪었다.
그의 형은 "사복을 입은 보안사 요원들이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을 못 오게 조문객들까지 막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안사 요원들의 경비를 뚫고 한 남자가 임분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정연관은 부재자 투표 때문에 죽었다"라고 말했다. 최초의 부재자 투표에서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야당 대표에게 투표를 해 구타를 당해 숨졌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준 것은 요한이었다. 이에 정연관 어머니는 "요한이가 다 데리고 다녔다. 김대중 집에도 가고 노무현 변호사도 만나고 다 만났다. 요한이 다 연결해줬다"라고 했다. 또한 정연관 형은 "헌병대에서 조사한 기록을 어떻게 알고 요한이 다 가지고 왔다.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요한이 정연관 상병 군대 선임들의 증언이 담긴 녹음테이프도 포착되었다. 녹음 내용에는 정연관 상병의 석연찮은 죽음에 대한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숨진 유가족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공동체인 한울삶. 요한은 그곳 사람들과도 함께 했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투쟁 현장 제일 앞에 섰던 사람이다. 얼굴도 기억나고 다 기억난다"라고 했다.
또한 하원근 일병 아버지는 "요한을 보고 우리는 미친놈이라고 했다. 우리는 가족이 죽었지만 그 사람은 누가 죽은 사람이 없는데 남의 일로 그렇게 제 몸을 부숴가면서 제일 앞에 앞장섰다. 고마웠지만 이상했다"라고 했다. 권희정 열사 어머니는 "요한은 지팡이 역할이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부모들 안 다치게 하려고 제일 앞에 앞장섰다"라고 설명했다.
민정당의 부정선거를 설명하는 자리에 있던 요한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가 알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작진은 사진을 근거로 요한의 흔적을 찾았다.
요한의 사진 속 장소는 바로 명동성당의 문화관이었다. 명동성당에 대해 안충석 신부는 "민주화의 성지다. 한 번은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도망을 왔다. 학생들을 잡으러 오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대학생들을 잡아가려면 우리를 짓밟고 가라 해서 못 잡아 간 적이 있다. 그렇게 보호해주던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은 요한을 기억했다. 그는 "정연관 상병 사망사건을 밝혀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가지 않게 해야 한다 하고 우리에게 촉발을 시킨 거다. 그러면서 국회에 청문회가 만들어지고 특위회가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이에 1989년 2월 양대선거 부정조사 특병위원회가 열렸다. 이 곳에서 정영관 상병의 사망 사건의 진상규명도 이뤄졌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요한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철용 전 의원은 "정연관 상병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것은 이한열, 박종철 열사의 죽음보다 훨씬 더 큰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여당 입장에서는 이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만 했다"라고 했다. 또한 "요한에 대해 민정당에서도 '뭐하는 사람이냐. 좌파냐? 종북이냐?'이런 식으로 몰아갔다"라며 "요한 그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정 상병에 대한 사건이 명맥을 이어갔는데 이때 3당 통합이 되어 버렸다"라고 했다. 이에 그렇게 진상 규명은 결론을 맺지 못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난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정연관 상병이 야권 후보에게 투표했다가 선임들에게 폭행당해 숨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건 발생 17년 후의 일이다.
요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료를 모았고, 그것이 축적되며 진상위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된 것. 그는 그 어떤 것도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요한은 의문사가 인정되자마자 분이 할머니를 찾아와 끌어안으며 고생했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 후 요한은 사라졌다.
이에 임분이 할머니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아무 목적도 없이 우리한테 정신을 쏟고 다녔는데 지금은 헤어져 있으니 정말 눈물 나게 보고 싶다"라며 요한을 그리워했다.
다시 2019년, 강원도 정선 봉화치의 씨돌 아저씨를 안다는 한 남자와 만났다. 그는 1995년의 삼풍백화점 사건에 대해 떠올렸다. 당시 민간 구조단장이었던 고진광 씨는 "뉴스를 보는데 구조 장비가 있으면 와달라고 하더라. 배낭에 장비를 넣어서 달려갔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죽어가는 분들을 보면서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다. 거기에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라며 그가 씨돌 아저씨라고 했다. 그는 "이 분은 30일 저녁에 왔다. 강원도에서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그는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 구조 현장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매달려서 목숨을 걸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씨돌 아저씨는 한 생명을 구출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김씨돌 아저씨는 언론사에 사고 희생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고진광 씨는 "당시 희생자를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컸던 거 같다"라며 "강원도에서 왔다는 이 분 이름이 요한이었다. 그렇게 불렀다"라고 말했다.
삼풍백화점의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들을 살리기 위해 강원도에서 한 달음에 달려간 자연인 씨돌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지팡이이자 방패가 되어 주고 정연관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낸 청년 요한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2019년 봄의 끝자락에서 그를 만났다. 너무도 변해버린 모습의 그는 용현이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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