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예술에서 전위적(前衛的) 태도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동력이다.
시대를 앞서는 새로운 시도,그리고 발상을 뒤엎는 전복은 예술의 본령인 실험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avant garde)’한 태도가 불편한 분야도 있다. 바로 정치다. 복잡다단한 인간의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내는 고차방정식에 비유되는 정치는 전위적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늘 사회 후방에서, 지쳐 쓰러진 영혼을 추스르고 달래는 역할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이다.
민감하고 예민한 인간의 문제를 실험정신이라는 미명하에 함부로 다뤘다간 십중팔구 낭패를 볼 수밖에 없을 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정치는 무릇 전위적이다. 예술보다 더 아방가르드하게 사회 전면에 나서 칼춤을 추고 있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최근 갈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진 체육분야를 놓고 보면 전위적인 한국 정치의 진면목을 십분 체감할 수 있다.
한국 체육은 지난 2016년 체육단체 통합을 단행한 이후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체육계의 지각변동을 몰고 올 만한 패러다임 시프트였기에 통합이후 진통은 불가피했겠지만 이질적 결합이 야기한 후유증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계획(plan)-시행(do)-평가(see)의 과정을 거치는 게 정책의 제대로 된 프로세스지만 통합 정책이 단행된 뒤 무슨 일인지 평가의 과정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통합이후 어떤 문제가 불거졌으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자취를 감췄고,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새로운 정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정책 역시 체육단체 통합 때처럼 정치권이 주도했다. 체육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공청회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체육단체 통합이후 대학스포츠협의회의 역할 증가,학교체육진흥회 출범,그리고 지자체장 체육단체장 겸직 금지를 골자로 한 체육진흥법 개정안 등등. 이 모두가 정치권의 일방적 주도로 이뤄진 정책이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일부 정치인들이 체육계와 전혀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법률을 발의하거나 정치공학적 셈법에 따라 정책을 밀어붙이는 통에 체육계는 숫제 넋이 나갔다. 지자체장 겸직 금지안의 법개정 취지는 정치로부터의 자율성 확보라지만 오히려 체육의 정치화를 부추기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으로 판명났다. 법개정 취지부터 자기모순에 빠지는 잘못된 정책에 대해 정치권은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다.
정책의 생명은 일관성이다. 그렇다면 체육단체 통합이후 쏟아진 체육 정책에서 일관성은 찾아볼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체육단체 통합이후 대학스포츠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대학스포츠의 분리,학교체육진흥회 출범으로 인한 초·중·고 스포츠의 분리,겸직금지법에 따른 지방체육의 분리,그리고 정부와 일부 정치인이 외치고 있는 KOC(대한올림픽위원회)의 분리 등을 종합해보면 체육단체 통합의 명분을 찾기 힘들다. 맥락적 흐름을 따지자면 분리의 기조가 오히려 더 논리적 정합성을 띠기 때문이다.
체육은 전문성과 경험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콘텐츠다.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정치는 ‘도우미’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체육현장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해주며 체육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치가 체육을 점령한 지금의 체육현실은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강물이 말라도 다리를 놓겠다고 허풍을 떠는 자들이다. 이런 작자들에게 체육을 모조리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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