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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그녀에겐 연습스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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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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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오딧세이-35] 지인의 합류 제의로 춘천 근처 골프장에서 운동할 기회가 있었다.

동반자 가운데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홀을 거듭할수록 일반 골퍼와는 다른 점이 신기로웠다. 무엇보다 그녀의 골프 진행 모습이었다.

우선 그녀에겐 연습스윙이 없었다. 준비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자 바로 티잉 그라운드에 나가 스탠스를 취한 후 공을 날렸다.

두 번째 샷을 위해선 항상 클럽을 2~3개 가지고 나갔다. 그중엔 웨지도 포함돼 있었다. 공을 그린에 못 올릴 경우를 대비해서다.

간혹 공이 러프나 경사 혹은 나무 사이로 들어가더라도 신통하게 공을 찾아냈다. 본인 공은 물론 동반자 공도 귀신같이 찾아줬다.

그린에선 늘 본인이 마크를 하고 공을 놓았다. 이미 그린에 올라오면서 라인을 파악해 놓은 듯했다. 이리저리 오가며 쭈그려 앉아 라인을 읽지도 않았다.

18홀 내내 한 치의 군더더기가 없었다. 프로대회에서도 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골프 실력보다는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진행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3무(無) 골프'였다. 연습스윙 없고, 공 잃어버리지 않고, 그린에서 꾸물대지 않는 것이었다.

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18홀을 끝냈다. 골프를 마치고 식사하면서 그녀가 한때 캐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골프에서 '느림보 진행(슬로 플레이)'이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숙제다. 프로선수, 아마추어 마찬가지다.

"고교 동기들과 월례회를 하는데 항상 슬로 플레이가 문제 됩니다. 조 편성에 어려움이 많아요. 어떤 때는 대책회의를 한 적도 있다니까요."

골프 월례회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다. 슬로 플레이는 주로 티샷, 이동, 아이언샷, 공 찾기, 그린에서 발생한다. 특히 티샷과 그린에서 슬로 플레이가 나오면 동반자를 지치게 한다.

"조금 더뎌도 괜찮아요. 하지만 분명 다음 동작을 기대했는데 예상치 않은 동작이 나와 시간을 끌면 맥이 풀려버리죠."

골프 교습가 임진한 씨는 "아마추어들은 심한 경우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서로 포용한다"면서도 "연결되지 않는 엉뚱한 동작으로 시간을 허비하면 동반자들 경기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시간을 많이 소모해버려 동반자들이 사용할 시간까지 빼앗는 행위다. 당연히 동반자들은 서둘게 되면서 리듬이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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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인 슬로 플레이어는 기피 대상이 된다. 본인이 늘 나서서 동반자를 모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합류제의가 없는 사람은 보통 두 부류다.

매너에 문제가 있거나 슬로 플레이어로 보면 된다. 이런 징후가 있으면 바로 자각하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골프 왕따'를 당한다.

프로세계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미국 골프닷컴이 싫은 동반자 유형으로 26%가 느림보 골퍼를 꼽았다.

브라이슨 디섐보(29·미국)와 로리 사바티니(43·미국)가 21%로 불명예 공동 1위를 기록했다. 특히 디섐보의 슬로 플레이는 악명 높다. '필드의 물리학자'라는 고상한 명예를 이것으로 다 까먹는다.

지난 8월 노던 트러스트대회 도중 그린에서 65m 떨어진 샷을 하는 데 3분을 소비했다. 그린에선 2m 버디 퍼팅을 위해 동반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2분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우승한 패트릭 리드(29·미국)보다 디섐보의 늑장 플레이가 더 화제였다. 경기 종료 후 갤러리들은 물론 동료들까지 SNS에서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PGA 통산 5승인 J B 홈스(37·미국)도 이에 못지 않다. 지난해 파머스 인슈어런스대회 최종일 세컨드 샷을 하는 데 4분을 넘겼다.

선두였던 알렉스 노렌(스웨덴)은 결국 정확한 우드샷에 실패해 우승을 확정짓지 못했다. 그는 일몰로 다음날 연장전에서 제이슨 데이(32·호주)에 패하고 말았다.

빠르기로 소문난 세계 1위 브룩스 켑카(29·미국)도 홈스의 희생양이다. 올해 디오픈 마지막 날 홈스와 동반한 켑카는 시종 표정이 흐렸다.

갤러리들이 시계를 가리킬 정도로 슬로 플레이를 경고했건만 홈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켑카(4위)와 홈스(67위) 둘 다 무너지고 말았다.

토끼와 거북이 모두 망가진 케이스. 특히 지적받은 홈스는 이날 무려 16타를 까먹으며 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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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통산 48승을 올린 낸시 로페즈(62·미국)도 슬로페즈(Slopez)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느림보였다. 남편이 조언해도 화를 내며 듣지 않다가 "그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며 뒷날 회고했다.

"슬로 플레이가 골프를 죽인다"는 말이 있다. 이래서 미국에선 올해 준비된 선수부터 샷을 하고 깃대 꽂고 퍼팅, 무릎 부위 드롭 등 새 규정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에 유러피언투어가 먼저 칼을 빼들었다.

내년부터 한 라운드에서 2차례 시간 제한 규정을 어기면 1벌타를 부과한다. 첫 번째 샷은 50초, 이후 40초로 한다. 제한 규정 15차례를 어기면 벌금으로 올해보다 3배 높은 3800만원을 물어야 한다.

대한골프협회(KGA)에도 이런 규정이 있지만 지난 10년간 한 번도 벌타를 주지 않았다. 프로골프협회(KLPGA)도 "슬로 플레이어는 많아도 패스트 플레이어는 적다"면서 문제점만 인식하는 정도다.

왜 이런 슬로 플레이가 유독 골프에 많을까.

"완벽하게 공을 쳐야 한다는 불안감이 작용하죠. 연습장에선 신중하게 하고 필드에선 과감하게 해야 합니다." 안성현 SBS골프 해설위원의 말이다.

김재열 SBS골프 해설위원은 "골프를 못 치기 때문이 아니라 스코어에 연연한 나머지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본인이 전혀 슬로 플레이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어 친한 동반자라면 분위기를 살펴 알려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골프를 하면서 자그마한 목표를 세웠다. 연습스윙을 없애는 것이다. 공 뒤에서 가볍게 클럽을 휘두르고 바로 스탠스를 취해 공을 날리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스탠스를 잡은 후 진지하게 연습스윙을 한 다음 샷을 날리는 프로선수를 여태껏 본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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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플레이 어떻게 방지하나

그날 함께 골프를 했던 그녀는 "매너·에티켓 없이 무작정 필드에 나오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동반자에게 배워야 하는데 동반자마저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

슬로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①자기 순서를 기다려 미리 준비하라

②프리샷 루틴을 단순하고 간소하게 하라

③찾기 힘든 공에 미련 가지지 마라

④클럽은 적당하게 2~3개 가져 가기

⑤경기 진행 속도를 보며 신속히 이동

⑥멀리건은 전·후반 1개 이하로 제한

⑦자신이 마크하고 라인도 읽고 퍼팅하기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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