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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이슈 [연재] 파이낸셜뉴스 '성일만의 핀치히터'

이정후, 장효조를 깨우다 [성일만의 핀치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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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통산타율 1위에 올라선 이정후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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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24·키움)가 큰 산 하나를 넘었다. 19일 SSG와의 인천 원정경기서 5타석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경기의 화제 중심은 안타나 홈런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타석이 더 중요했다.

이날 이정후는 통산 3000타석을 채웠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집계하는 생애 통산 타율 순위의 기준이 3000타석이다. 이정후의 통산타율은 0.339487. 1안타를 빼더라도 0.33911이다. 그러니 타석이 더 중요했다.

이정후는 이 부문 역대 1위 장효조(0.331)를 뛰어넘었다. 3위 박민우(NC)의 통산타율이 0.326이어서 당분간 이정후는 1위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60타수 무안타에 그쳐도 장효조보다 높은 0.33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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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타격 천재 장효조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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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 LG 2군 감독의 아들이다. 공교롭게도 이종범은 1994년 장효조의 시즌 최고 타율 2위 기록(0.387)을 깨트렸다. 백인천의 유일한 4할(0.412) 타율을 제외하면 사실상 1위 대접을 받아온 기록이었다.

야구기자의 눈에는 장효조의 이 두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장효조의 타격 재능이 워낙 뛰어났고, 통산 0.331이나 한 시즌 0.387은 정복하기에 너무 높은 산처럼 느껴졌다.

그 기록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깨졌다. 신기하게도 새 기록 작성 당시 두 부자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이종범은 건국대를 거쳐 프로 2년차이던 1994년 24살 때 0.393의 믿기지 않는 타율을 남겼다.

장효조가 0.387을 기록한 해는 1987년이었다. 그의 나이 31살 때였다. 27살에 프로 무대에 뛰어들어 5년차에 세운 기록이다. 24살의 장효조는 실업야구 포항제철에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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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오른쪽) 이정후 부자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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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0.387을 기록하던 해 겨울 트레이드 파동에 휩쓸렸다. 소속팀 삼성이 롯데와 그를 포함한 트레이드를 추진한다는 소문이었다. 결국 이듬해 시즌을 마친 후 롯데로 옮겼다.

그와 교환된 선수가 ‘야구 그 까짓 게 뭔데’라는 게임 광고 카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최동원이다. 첫 트레이드 파동 때 장효조와 오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맥주까지 곁들이며 그의 야구인생 전반에 대해 들었다.

인상적인 대목이 몇 있었다. ‘타격 달인’의 가장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궁금했다.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당연히 0.387의 타율을 기록한 그해(1987년)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가 말한 전성기는 한양대 2학년 때라고 했다. 당시의 대학야구는 지금과 달랐다. 대부분 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실업야구보다 대학을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박철순(연세대), 황규봉(고려대), 임호균(동아대), 선우대영(중앙대) 등 좋은 투수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타석에서 늘 안타를 때려낼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투수가 던진 공에 찍힌 공인구 마크(엄지손톱보다 조금 작다고 보면 된다)를 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나.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정후는 데뷔 후 5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지난해 타율은 0.360. 19일 현재 올시즌 타율은 0.295. 시즌을 끝낼 때쯤엔 3할을 넘어서 있을 것이다. 이정후를 만나면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야구공에 적힌 글씨를 본 적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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