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1 (토)

[스브스夜] '꼬꼬무' 윤동주, 생체실험의 희생자?…그의 시 지켜낸 정병욱과의 우정 '눈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SBS연예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윤동주, 생체실험의 희생자였을까?

3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시와 피'라는 부제로 정병욱 씨의 그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1940년 봄, 경성 연희전문대학교의 신입생 정병욱 씨의 방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그리고 병욱은 문을 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자신이 흠모해온 선배 윤동주였던 것.

정병욱이 기고했던 글을 본 윤동주가 그의 글이 마음에 든다며 병욱을 찾아왔던 것.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친우이자 형제처럼 함께 지냈다. 특히 윤동주는 완성된 시를 세상에 선보이기 전에 병욱에게 가장 먼저 선보였다. 그렇게 병욱과 함께 하던 시절 윤동주는 17편의 시를 썼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암흑기였던 시대에 시를 쓴 윤동주, 그는 19편의 시를 선별해 시집을 만들었다. 자필로 쓴 육필원고 3세 중 1권은 본인이 갖고 한 부는 스승님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부는 친우인 병욱에게 건넸던 것.

그런데 이때 진주만 습격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황국신민 화가 시작됐다. 특히 창씨개명을 실시하며 이를 어길 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했다.

1942년 창씨개명을 한 윤동주, 그의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참회록이라는 시를 쓰며 본인의 선택을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움을 안은 채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 그런데 이듬해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지목되며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병욱에게는 징집장이 날아오며 일본군에 징집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징집 며칠 전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그는 윤동주가 남긴 육필원고를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에 "절대 일본 순사에 들키면 안 된다. 저나 동주형이 올 때까지 잘 보관해달라"라고 어머니에게 맡겼던 것. 한글로 쓰인 이 시집은 그 시대 불온 문서나 다름없었고 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병욱은 "혹시 저나 동주형이 모두 죽고 돌아오지 못하면 이걸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려달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쟁터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 해 윤동주가 사망했다며 시신을 찾아가라는 전보가 왔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 윤동주의 사인은 뇌일혈. 뇌일혈은 뇌 안에서 출혈이 생기는 뇌출혈과 비슷한 병으로 갑자기 혈압이 높아질 때 혈관이 터지면서 사망하는 것인데 20대 혈기 왕성한 청년의 사인으로는 석연찮았다.

그리고 직원 하나가 "유족이 오지 않아서 시신을 규슈 제국 대학으로 옮기려던 참이다"라는 묘한 말을 남겨 의아함을 더했다.

그런데 가족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들 중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만난 것. 그는 윤동주와 같은 해 태어나 연희전문도 같이 다니고 일본 유학도 함께 온 후 같은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

몰골이 말이 아니던 송몽규는 못 알아볼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어떤 주사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놈들이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됐다. 동주도 저랑 똑같이 그 주사를 맞고 그리 됐다"라고 했던 것.

대체 주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본은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암산 테스트를 했는데 이는 임상 실험에서 흔히 부작용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이는 바로 생체 실험이었고, 마루타로 유명한 731부대가 생체 실험을 주도했다. 일본 관동군 방역 급수부는 2차 대전 당시 만주에서 생체 실험 자행했는데 실험 대상을 일본 말로 껍질 벗진 통나무라는 의미의 마루타라 불렀다.

이들은 소량 가스로 대량 학살이 가능한지 실험하고 동상 실험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하는 등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했다.

그리고 잔인한 실험의 대상은 전쟁 포로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나 증언도 모두 남아있지만 일본은 "731부대는 있었으나 생체 실험은 하지 않았다"라고 지금도 발뺌하고 있다.

미군에 대한 생체 실험을 진행한 곳은 규슈 제국대학은 윤동주의 시신을 보내려던 곳이었다. 이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특히 당시 그들이 실시한 실험은 정맥에 바닷물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수혈용 혈액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혈액을 대체할 것을 찾으며 바닷물을 주입했던 것.

전문가는 정맥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며 "소독을 완전히 한다고 해도 뇌혈관에 감염이 일어난다. 뇌일혈 증상과 비슷한 증상이 나온다"라고 말해 윤동주 또한 같은 실험을 당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했다.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나 규슈 제국대학 등은 기록이 없다는 말만 할 뿐, 남은 기록은 후쿠오카 형무소의 사망자가 해가 갈수록 2배씩 사상자가 늘어난 기록뿐이었다. 윤동주가 사망한 해에는 무려 259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상당수가 생체 실험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진실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1945년 3월 고향마을에서 동주의 장례가 치러졌고 그날 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낭독되었다. 대부분의 윤동주 시에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깔려있는데 이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에 부끄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 윤동주의 모습은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죽음 앞에 조선의 독립을 이야기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떠났던 것.

그가 사망하고 6개월 후 독립이 왔다. 그리고 병욱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맡겨 둔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찾았다. 본가 마루 바닥 아래 윤동주의 원고를 숨겨뒀던 어머니 덕분에 원고는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일하게 남겨진 윤동주의 원고, 그렇게 시는 살아남고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둔 1948년 첫 시집이 발간됐다. 이는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시집이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남긴 육필 원고에는 쓰였다 지워진 글씨 흔적이 있었다. 병원이라는 글. 사실 윤동주는 본래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붙이려고 했었던 것. 환자 투성이의 세상에 자신의 시가 병원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정병욱은 문학가로서 윤동주의 친우로서 사명감을 갖고 평생 국문학자로 남았다. 그리고 정병욱의 여동생과 윤동주의 남동생이 결혼하며 병욱과 동주는 진짜 가족이 되었다. 또한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중에 있던 흰 그림자를 호로 만들어 윤동주에 대한 마음을 영원히 새겼다.

그런데 병욱은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후세가 윤동주와 그의 시를 스스로 느끼고 이해하길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병욱은 82년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병욱은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준 씨앗의 결실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라며 평생 윤동주와 함께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날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문학이라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읽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인 것 같다"라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시가 더 와닿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 시대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부끄러움을 알았다면 과연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부끄러움을 몰랐던 그 시대를 안타까워했다.

▶ 스타의 모든 것! [스브스타]
▶ 스타 비하인드 포토
※ ⓒ SBS & SBS Digital News Lab. :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