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가 배출한 최고 타자 이승엽이 감독으로 변신했다. 사진=스포츠서울 박진업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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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LA=문상열전문기자] 보스턴 레드삭스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2002년 사망)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자 가운데 한 명이다.
국내에서는 MLB 마지막 4할 타자로 더 유명하다. 그는 3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영웅이다. 그럼에도 1960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타율 0.344, 521홈런,1839타점을 남겼다. 통산 출루율 0.482는 MLB 최고 기록이다. 깰 수 없는 기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도 홈런을 때렸다.
마지막 4할(1941년), 타격 3관왕(1942, 1947년)을 두 차례 차지했을 때 MVP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 때마다 MVP는 라이벌 뉴욕 양키스에게 돌아갔다. 윌리엄스는 통산 2차례 MVP를 수상했고, 기자단 투표에서 2위만 4차례였다.
1960년 19년의 화려한 MLB 경력을 마감한 윌리엄스는 1969년 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신 워싱턴 세네터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1969년은 MLB가 양 리그를 동부, 서부로 지구를 나눈 첫 해다. 세네터스는 AL 동부지구였다.
첫 해 윌리엄스는 86승76패 승률 0.531로 4위를 기록했다. 선두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역대급 109승을 올려 1위와 게임 차는 무려 23.0이었다. 이후 3년 더 지휘봉을 잡은 윌리엄스는 한 차례도 승률 5할 이상을 작성하지 못했다. 이후 윌리엄스는 감독으로 복귀하지 않고 야인으로 생활했다.
MLB가 1876년 출범한 이래 지금까지 총 834명의 감독(대행)이 배출됐다. 이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는 슈퍼스타 윌리엄스다. 현재와 같은 프리에이전트 체제였다면 윌리엄스가 굳이 감독을 할 리 없었다. 그 시절에는 연봉이 높지 않았다. 데릭 지터처럼 은퇴 후 야구단 경영에 참가했을 것이다.
구단 경영은 능력이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성적으로 즉시 능력을 평가받는 자리다. 슈퍼스타 이미지는 감독 지휘봉을 잡은 뒤 자칫 곤두박질 칠 수 있기에 위험한 도박이다.
이승엽은 KBO가 배출한 역대 최고 타자라는데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필자도 삼성 전담기자로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는 현재와 같은 슈퍼스타 정도는 아니었으나 한양대를 포기하고 삼성 라이언즈 입단 후 스타플레이어로 자리 잡았을 때다. 취재한 역대 슈퍼스타 가운데 가장 겸손했다는 인상은 현재도 남아 있다. 부친 이기광 씨도 겸손하고, 조용한 분으로 기억한다. ‘겸손한 게 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승엽이 MLB였다면 분명 구단 경영에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슈퍼스타가 감독이 돼 성공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래서인지 보통의 코치들은 ‘슈퍼스타들은 실패한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잣대로 사고와 기량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슈퍼스타들은 노력과 함께 하늘이 준 몸, 기량을 갖고 태어났다. 보통 선수와는 다르다. 하지만 장기레이스에는 보잘 것 없는 선수도 팀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야구처럼 144경기 일정에 부상으로 예상치 못한 전력하락 등도 대비해야 한다.
이승엽의 두산 감독행에 아쉬운 점은, 전력이 탄탄한 팀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험이 일천한데 전력마저 약하면 고난의 연속이다. 두산은 돈쓰는 구단이 아니다. 그동안 스카우트-육성-야구를 잘아는 프런트의 힘이 합쳐 좋은 결과를 얻었다.
2022시즌 모든 게 바닥이 된 상황에서 이승엽 감독이 팀을 맡게된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한 슈퍼스타 감독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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