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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스브스夜] '꼬꼬무' 아름다운 지리산을 만들어 낸 '그날의 그들'…'1998 지리산 폭우 참사'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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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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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1998 지리산 폭우 참사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한여름 밤의 악몽 - 1998 지리산 폭우'라는 부제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날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1998년 7월 31일, 여덟 살 민수 가족은 지리산 계곡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IMF로 경제 위기를 맞았던 지라 많은 이들이 휴가를 맞아 호텔이나 펜션보다는 야영을 선택했고 이에 민수네가 향한 대원사 계곡에만 무려 1400여 명이 입산했다.

조금 떨어진 화개계곡도 마찬가지. 수백 개의 텐트가 계곡에서 야영을 하기 위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화개면사무소로 긴급 지시가 전해졌다. 갑자기 비가 쏟아질 것이라는 소식에 서둘러서 야영객들을 철수시키라는 것.

이에 늦은 시각까지 근무 중이었던 공무원들은 서둘러 화개계곡의 야영객들을 철수시켰다. 그런데 그때 순식간에 불어난 계곡물이 다리까지 무너뜨렸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덮쳐왔다.

갑작스러운 집중 호우로 곳곳에서 피해 소식이 전해졌고 지리산은 불어난 물 때문에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원사 계곡에도 비가 오기 시작했고, 물이 점점 차오르자 야영 중이던 사람들은 텐트를 버리고 대피했다. 계곡에는 텐트에서 잠이 든 민수와 민수 아빠만 남은 상황.

민수 아빠는 민수를 업고 사력을 다해 대피를 했다. 그런데 물이 점점 더 차오르며 아빠의 걸음은 느려졌고, 아빠는 민수를 나무 위로 올라가게 했다.

나무에 겨우 올라간 여덟 살 민수는 아빠가 있는 아래를 보았다. 그런데 아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덟 살 민수만 남겨두고 아빠는 계곡물에 휩쓸려 갔던 것. 홀로 남은 민수는 나무 위에서 몇 시간을 버티고 또 버텼다.

이날의 엄청난 폭우는 지리산 강수량의 역사를 바꾸었다. 유례없는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는데 이는 관측 사상 최고의 강수량이었다.

순천의 종전 최대 기록이 61mm이었는데 이날은 무려 145mm가 내렸던 것. 그리고 평지가 아닌 계곡의 경우 폭우로 인한 피해는 몇 배에 달했다.

집중 호우 속에서 나무에 아이가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 이들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열 씨는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민수를 무사히 구조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불빛을 발견하고 다시 구조 작업을 시작했다.

다리가 무너져 구조대원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위험하다는 생각보다 조금이라도 서둘러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구조를 시작했다.

그는 폭우 속에서 한 명 한 명 사람들을 구조했다. 적열 씨는 어린아이부터 노약자 등 우선순위대로 업거나 안거나 하며 직접 급류를 헤쳐 나왔다. 그렇게 그는 무려 거센 계곡 물을 26번 왕복했다. 몸을 사리지 않고 구조 작업을 한 그를 보고 모두가 구조대라 생각할 정도. 적열 씨는 무려 30명을 구조했다.

하지만 그런 의인이 존재했음에도 다음 날 지리산의 모습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도로 곳곳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파헤쳐졌고 소나무가 뽑혀 나가고 큰 바위들이 떠내려갔다. 철도 선로가 유실되어 철도 운행까지 중단되었다. 그리고 실종 신고는 점점 늘어나 공식적 사망, 실종자는 103명에 달할 정도.

산악지역 최대 인명 참사인 이 사고에 대해 기록되지 않은 실종자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족 단위의 피해자가 남았으며 이에 일행 모두가 실종되었다면 신고할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해자들 중에는 민수의 아빠도 있었다. 민수 아빠는 민수가 구조된 나무 바로 아래에서 텐트에 몸이 감긴 채 발견되었다. 아들을 구하고 빠져나가지 못했던 것.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구조대원들만 바라보았다. 시신이라도 찾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참사로 인한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났다. 수십 시간 구조 작업을 하던 이정근 구조 반장이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던 것. 급히 동료들이 그를 구조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직도 그를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그의 유가족들. 그의 아들은 소방관도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어느 가족의 가장일 것이라며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시고 좋은 일을 하면 많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라고 말해 뭉클함을 자아냈다.

의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20세 김규수 군은 폭우가 쏟아지자 사람들을 깨우고 30여 명을 대피시킨 뒤 마지막 사람을 구조해 나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32세 김영덕 씨는 50여 명을 대피시키고 반대쪽 사람까지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위험 속에서도 타인을 위했던 많은 의인들, 그들 중에는 민수를 포함해 30명을 구한 적열 씨도 있었다.

구조 후 병원으로 간 적열 씨. 사실 그는 구조 과정에서 무릎인대가 파열되었음에도 그 고통을 잊고 구조작업에 집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보행장애 7급에 의상자로 선정된 그는 이 사건 후 직업이 달라졌다. 그는 특채로 지리산 국립공원 직원이 된 것. 그는 20년 넘게 지라신을 지키며 다시는 과거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빌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민수에 대해 "잘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보고 싶다"라고 했다.

구조 후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던 민수. 그럼에도 늘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적열 씨.

이에 방송은 이제는 서른넷이 된 민수 씨를 찾아 나섰다. 민수 씨는 "진짜 죄송하지만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함도 못 느낄 정도로 그때의 기억은 제 인생에서 많이 배제되어 있는 상황이다. 집에서는 그 일이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했다. 여름이 되고 장마철이 되면 26년 정도가 흘렀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와 어머니는 똑같은 여름을 보내고 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저를 구해주신 분이 구조대원도 아니셨는데 저를 구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출연을 마음먹게 됐다"라고 밝혔다.

그렇게 적열 씨를 만난 민수 씨.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자신을 구해준 적열 씨의 존재를 알았다고.

적열 씨는 잘 자라준 민수 씨에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민수 씨도 뒤늦게나마 적열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선물과 편지를 건넸다. 민수 씨는 "지리산의 그 일들은 저와 가족들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로만 여겨질 뻔했는데 마음 따뜻해지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을 주는 원동력으로 바꿔주셔서 감사하다. 나무에 올라가 있던 저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것처럼 급류에 빠지시면서도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앞으로 저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분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듭니다. 또 뵙는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앞으로의 인연을 약속하며 진심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한 천재지변이지만 유독 피해가 컸던 지리산 폭우 사고. 이는 뒤늦은 호우경보로 대피가 늦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또한 지리산 계곡 내에서는 야영이 불가함에도 위험성을 몰랐던 당시 분위기도 문제였다. 이를 관리하고 단속하는 기관도 안일한 대처를 했던 것.

이와 달리 선재 대응을 한 화개계곡은 당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지리산에는 우량 경보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15m 이상 폭우에 사이렌이 울리지만 사고 당시 이 경보기 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각각의 빈틈이 모여 참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지리산은 달라졌다. 지정된 장소 외 야영이 금지됐고 강화된 관리공단의 직원 교육, 재난 안전관리 인력과 시스템도 확대되며 26년간 폭우로 인한 인명 사고는 전무했다.

그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된 지리산, 앞으로를 위해 더욱 그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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