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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장염 통해 되새긴 무념무상의 힘, 확신 삼가는 마운드 위의 철학자 [SS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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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LG 임찬규가 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KBO리그 SSG와 경기 7회초 수비를 마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임찬규는 7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2024. 9. 4. 잠실 | 박진업 기자 upandup@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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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잠실=윤세호 기자] 일부러 힘을 빼고 던지는 것 같았다. 속구 구속이 시속 130㎞대에 머물러도 장기인 커브와 체인지업을 앞세워 순항했기에 힘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판이었다. 경기 후 마주한 순간부터 이를 확신했다. 창백하고 홀쭉한 얼굴이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지 3일 정도 됐다”는 말에 궁금증이 풀렸다. 지난 4일 최악의 상황에서 7이닝 10삼진 0볼넷 무실점 호투를 펼친 LG 임찬규(32)다.

경험이 적은 투수였다면 정반대의 결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신예 시절처럼 마냥 구위에 의존했다면 130㎞대 속구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임찬규는 그런 투수가 아니다. 150㎞를 던지지 못해도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최고 구속이 145㎞면, 구위를 활용한다. 최고 구속이 140㎞면 변화구를 활용해 답을 찾는다. 다사다난한 프로 14년의 시간이 임찬규를 달인의 길로 인도했다.

그만큼 훈련하고 공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급 투수의 투구를 참고했다. 트래킹 데이터에 눈을 뜨면서 피치 터널 개념을 뚜렷이 정립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뉴스쿨과 올드스쿨을 두루 섭렵했다. 현역 투수 중 임찬규만큼 깊이 있게 투구론을 전달하는 이는 많지 않다.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도 굳건히 마운드를 지킨 비결도 여기에 있다. 임찬규는 잠실 SSG전에서 시즌 9승을 올린 후 “사실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장염에 시달려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경기 전 불펜 피칭을 하는데 스트라이크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경기 당일 컨디션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음을 많은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임찬규는 “불펜과 마운드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럴 때일수록 (박)동원이 형만 믿고 던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고개를 흔든 게 딱 한 번뿐이었다. 무념무상으로 동원이 형 사인을 따랐다. 의식하지 않았기에 컨디션이 안 좋아도 내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평범한 볼배합은 아니었다. 81개의 공을 던졌고 속구 24개·커브 29개·체인지업 19개·슬라이더 9개였다. 커브와 체인지업이 장기인 임찬규지만, 그래도 커브가 속구보다 비율이 높은 경우는 많지 않다.

이유는 뚜렷했다. 임찬규는 “공이 안 가고 구속이 안 나올 때는 커브가 좋다. 꺾이는 각도 커지고 속도 조절도 잘 된다. 오히려 속도가 잘 나올 때 커브도 구속이 오르면서 덜 꺾이고 상대 스윙 궤적에 걸리기 쉽더라”고 밝혔다. 이날 임찬규 커브의 최고 구속은 113㎞. 최소 구속은 93㎞였다. 같은 구종도 속도에 편차를 두는 임찬규 특유의 피칭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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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임찬규가 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KBO리그 SSG와 경기에 선발 등판해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2024. 9. 4. 잠실 | 박진업 기자 upandup@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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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인 순간도 있었다. 숫자를 멀리하려 하지만 개인 최다 삼진을 머릿속에서 지우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임찬규는 “7회 나도 모르게 삼진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에레디아와 고명준 선수를 상대할 때 2스트라이크까지 갔다. 땅에 떨어지는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이때 딱 한 번 고개를 흔들고 커브에 고개를 끄덕였다”면서 “이게 문제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삼진이 나왔다고 본다. 삼진을 의식하면서 오히려 원하는 커브를 던지지 못했다. 그냥 동원이 형 사인만 보면서 갔다면 11번째 삼진도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 욕심내면 안 된다”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재차 다짐했다. 개인 최초로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 그리고 3점대 평균자책점이 눈앞인데 이를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등판에서는 최대한 전광판을 안 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임찬규는 “(김)광삼 코치님께서도 이를 강조하신다. 전광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맡기듯 던지라고 하신다. 기록은 세우면 정말 좋지만,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님을 잘 안다. 하다 보면 나오는 게 기록이다. 다음 등판에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던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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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임찬규가 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KBO리그 SSG와 경기에 선발 등판해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2024. 9. 4. 잠실 | 박진업 기자 upandup@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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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규의 다음 등판 경기는 오는 10일 잠실 롯데전 혹은 11일 잠실 키움전이다. 키움을 상대한다면 SSG전과 비슷한 볼배합을 펼칠 수 있다. 젊은 선수가 많았던 SSG 라인업처럼 키움에도 젊은 선수가 많다.

이에 관한 질문에 임찬규는 “야구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상대 타선의 나이와 경험을 의식했다. 보통 젊은 타자가 변화구에 약하고 베테랑 타자는 속구에 약하다고 하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만큼 야구는 변수가 많다. 사실 올해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날이 NC전(8월9일 2.2이닝 7실점)이었다. 라인업에 젊은 타자도 많았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안 되는 게 야구”라고 현명하게 답했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유머 감각도 덧붙였다. 투구 후 디트릭 엔스, 엘리에이저 에르난데스와 대화하는 모습이 잡힌 것을 두고 “‘왜 더 안 던지냐’고 묻더라. 그래서 ‘장염 때문에 계속 화장실을 가고 있다. 지금 우리 흰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계속 던졌다가 큰일 난다’고 했다. 사고 없이 오늘 투구를 마친 게 다행”이라고 밝게 웃었다. bng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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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임찬규가 27일 잠실 KT전에서 호투하며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사진 | 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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