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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퀸시 존스의 존스의 홍보 담당자인 아널드 로빈슨은 그가 지난 3일(현지시간) 밤 LA의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성명을 통해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상실이지만, 우리는 그가 살았던 위대한 삶을 기린다"며 "그와 같은 인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전성시대를 함께 연 퀸시 존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 프로듀서다. 각각 88차례 그래미 후보에 오른 비욘세, 제이지에 이어 3번째로 많은 80차례에 걸쳐 그래미상 후보에 선정됐고, 이 가운데 28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33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이혼 뒤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주로 이사한 뒤 10대부터 본격적인 음악가의 삶을 시작했다. 14살 때 시애틀의 클럽에서 전설적 음악가 레이 찰스와 밴드 활동을 하며 트럼펫을 연주했고 그 뒤 보스턴, 뉴욕으로 진출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쳤다.
1958년 프랭크 시나트라를 만나 1984년 그의 마지막 앨범인 'LA 이즈 마이 레이디'(LA Is My Lady)까지 함께 작업을 했고, 클리퍼드 브라운, 듀크 엘링턴 등 다른 유명 재즈 아티스트의 앨범을 작업하면서 더욱 명성을 쌓았다.
특히 마이클 잭슨과 함께하며 세계적 성공을 거뒀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대표 음반 '오프 더 월'(Off The Wall) '스릴러'(Thriller) '배드'(Bad) 등을 프로듀싱했다. 당대의 스타들이 한목소리로 부른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유명한 아프리카 구호 앨범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 역시 그의 작품이다.
퀸시 존스는 음반 프로듀서뿐 아니라 뮤지컬, 영화음악, TV 프로그램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을 공동 제작했다. 당시 그가 시카고의 토크쇼 진행자로 활동하던 오프라 윈프리를 배우로 직접 캐스팅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미디어 회사인 '퀘스트 방송'(Qwest Broadcasting)을 세웠고, 1993년 미국 잡지 타임과 협력해 흑인음악 잡지인 '바이브'(Vibe)를 창간했다. 또한 흑인 노예와 그 후예의 삶을 그린 '뿌리'(Roots)로 에미상을 수상했고 두 차례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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