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천 前 축구국가대표
한국 축구 역대 득점랭킹 4위 박이천./ 사진제공=전형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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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스포츠전문 기자 = 전설의 득점왕이 있다. 대한민국 역대 득점랭킹 4위. 1위는 58골의 차범근, 2위는 50골의 황선홍, 4위가 40골의 박이천(77)이다.
- 오랫동안 대표팀 득점 랭킹 3위였다가 손흥민에 3위 자리를 내줬다.
"손흥민이 49골로 나를 넘어섰다. 역대 득점 랭킹 1위까지 전진하기 바란다."
- 고향이 이북이다.
"함경남도 원산이다. 6.25 때 월남했다. 전쟁 때 기억은 없다. 너무 어렸으니까."
- 축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영등포 영도중학교 3학년 때 시작했다. 11월에 우리 학교가 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선수가 10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감독이 일반 학생 중에 그래도 공을 좀 차는 사람을 뽑았다. 그렇게 해서 시작했다."
- 바로 두각을 나타냈나.
"아니다. 어쨌든 축구를 계속했다. 윤재봉 감독님이 영도중, 영등포공고 감독을 겸직했다. 그래서 영등포공고를 2년 동안 다니다가 광주상고로 전학했고 다시 서울에 와서 동북고등학교를 갔다. 고등학교를 4년 다녔다."
- 그때 동북고 선수들은 누구였나.
"훗날 대표팀 유명 선수로는 이회택 감독이 우리 1년 후배, 중거리슛의 명수 김기복 감독이 우리 선배였다."
- 당시 동북고 박병석 감독은 굉장히 선진적으로 축구를 가르쳤다고 한다.
"기본적인 볼 컨트롤, 부분 전술 이런 걸 많이 가르쳐 주셨다. 최신 외국 축구 자료를 번역해서 프린트물로 만들어 지도했다."
- 청소년 대표로는 언제 뽑혔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중앙대에 가서 뽑혔다. 1967년이다. 1969년에 대표팀에 선발돼서 10월에 열린 1970년 월드컵 1차 예선에 출전했다. 한일전이 데뷔전이다. 4경기를 다 뛰었다. 한국, 일본, 호주의 더블리그였는데 호주에게 1무1패로 밀렸다."
- 임국찬의 페널티킥 실패로 유명한 경기다.
"페널티킥을 넣었으면 동률 재경기였다. 그때는 득실차를 따지기 전이다. 임국찬 선배가 땅을 차서 공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페널티킥을 차러 나가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더라. 결국 이민 가셨다."
-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 때문에 월드컵 진출 시 포상금이 컸다고 들었다.
"이문동 중앙정보부 사택을 한 채 씩 준다고 했다."
-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은 대한민국의 사상 첫 아시안게임 우승이다.
"8월 메르데카, 11월 킹스컵을 다 우승했다. 아시안게임 결승은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0-0으로 비겨 공동우승했다. 일본과의 준결승 때 이회택의 패스를 받아 일대일 상황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1970년 대표팀 훈련장에서 촬영한 젊은 시절의 박이천./ 사진제공=이재형 축구수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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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뮌헨 올림픽 예선, 서울운동장에서 말레이시아에게 0-1로 진 통한의 패배도 기억한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는데 졌다.
"1971년 9월이다. 비가 왔다. 우리가 못했으니까 진 거다. 암만 수중전이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당시 멤버가 정말 좋았다."
- 경기 지고 나서 든 느낌은.
"좀 허무했다. 월드컵, 올림픽 등 큰 대회에 꼭 나가보고 싶었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 1974년 월드컵 예선 탈락도 가슴 아프다. 이스라엘을 1-0으로 꺾고, 최종 결정전에 가서 또 호주에게 밀렸다.
"10월 28일에 시드니가서 0-0으로 비기고, 11월 10일 서울에서 2-0으로 앞서다 2-2로 비겼다. 1주일 뒤에 홍콩으로 가서 0-1로 졌다. 지금 생각해도 2-2 무승부가 아쉽다."
- 왜 그런가.
"이세연이 골키퍼를 봤다면 어땠을까 미련이 남아서다. 변호영이 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이세연의 성격이 담대하니 2-0 리드 상황을 좀 더 잘 관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1대0으로 진 경기는 뛰었나.
"좀 아파서 끝날 무렵에 뛰었다."
- 처음부터 뛰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 대표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골은.
"1972년 9월 제1회 한일정기전 도쿄 경기다. 종료 직전 가마모토에게 골을 먹어 2-2로 비겼다. 가마모토가 선제골도 넣었는데, 제가 40미터 롱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나머지 한 골은 이차만이다."
- 선수 시절 기억나는 일화는.
"국가대표로는 1972년 6월 산토스 방한 경기 끝나고 펠레랑 유니폼 교환한 것이다. 국내 경기로는 소주병에 이마를 맞아 다섯 바늘 꿰멘 사건이다."
- 왜 그랬나.
"1973년 제21회 대통령배 결승 국민은 대 상업은의 결승전이다. 국민은은 정규풍과 제가 주축이었고 상업은행은 김호가 핵심이었다. 74분에 제 왼발 슛이 크로스바를 스치며 들어갔다. 84분에 이우현 주심이 제가 넘어졌을 때 페널티킥을 부니까 상업은행 선수들이 심판을 구타했다."
- 기억한다. 오랜만의 야간 경기라 관중도 만원이었다. 심판 옷을 찢고 난리도 아니었다.
"경기 끝나고 감독님 헹가레 치는데 관중석에서 소주병이 날아와 이마가 찢어졌다. 울면서 관중석으로 쫓아 올라갔다."
소주병에 이마가 찢어진 박이천. 당시 신문에 실렸던 사진이다./사진제공=박이천 |
- 지도자로서 대단한 경력을 쌓았다. 가장 기억나는 제자는.
"고대 나오고 1998년 월드컵에도 간 김대의 선수다. 빠르고, 기본기도 탄탄했다. 성남 프로축구단에 차경복 감독이 계실 때인 2002년 최우수선수상도 받았다. 중학교 때 데려다가 고등학교 1학년부터 기용했다. 그래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
- 지도자 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면.
"청소년 대표팀 감독(1996~1997) 때다. 아시아 청소년 대회 때는 압도적인 성적을 냈는데 결과적으로는 세계대회 나가서 성적을 못 냈다. 그점이 아쉽다."
- 그때 한국은 브라질에게 3-10으로 졌다. 다음 경기에서 벨기에도 브라질에게 0-10으로 패했다.
"청소년 선수들은 경기 중 멘탈이 흔들리면 복구가 쉽지 않다. 그런 것에 관계없이, 어떻든 골을 많이 먹었다는 건 굉장히 뼈아픈 기억이다."
- 왜 그렇게 선수들이 무너졌나.
"우리는 다 고등학교, 대학 선수들이었고 브라질은 다 유명 프로 선수였다. 실전 경험량 자체가 달랐다. 아마 그런 차이인 것 같다."
- 그때 멤버 중에 김도균, 이관우, 박진섭 등 프로팀 지도자가 많이 나왔다. 정유석 골키퍼도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를 오래 했다.
"본인들이 열심히 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모두들 지도자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 축구팬에게 한말씀 부탁한다.
"흘러간 선수지만 항상 팬 여러분들한테 감사드린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직접적으로 축구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은 다 지나갔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한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응원하고 기원하겠다."
▲ 박이천은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6.25 때 월남한 후 영도중, 동북고를 졸업했다. 중앙대 체육교육과를 중퇴하고 양지(1968~1970), 국민은행(19671~1976), 홍콩 해봉(1978), 남화(1980)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로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88경기 출장, 40골 득점으로 다득점 역대 4위다. 지도자로는 광운전공(1976), 정명고(1986~2003), U-17 대표팀(1990), U-20 대표팀(1996~1997) 감독을 역임했다. 인천유나이티드(2004~2008)에서 기술고문, 감독대행, 부단장을 지냈고 2019년 3부리그 시절의 청주FC에서 단장으로 봉사했다.
박이천(왼쪽)과 장원재 전문기자. 소년 시절의 영웅을 만나서 표정이 굳어있다./ 사진제공=전형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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