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오픈 통산 우승 횟수 6회 vs 0회, 통산 상금 1억1000만달러 vs 170만달러, 개인 최고 랭킹 1위 vs 44위….'
전 세계 테니스 전문가 대부분이 노바크 조코비치(31·세르비아)가 정현(22·한체대·삼성증권 후원)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부상 후유증으로 세계 랭킹이 14위까지 떨어졌다지만 호주오픈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무결점' 조코비치가 세계 랭킹 58위인 한국의 유망주에게 덜미를 잡힐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현은 조용히 기다렸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끝내 놓치지 않으면서 호주오픈 센터코트(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모인 관중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정현은 22일(한국시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총상금 5500만호주달러·약 463억원) 8일째 남자단식 16강전에서 전 세계 랭킹 1위 조코비치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한국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4개 그랜드슬램 대회(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2년 전 호주오픈 1회전에서 조코비치를 만나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0대3으로 패했던 기억이 있는 정현이기에 이날의 승리가 더욱 달콤했다. 정현은 32강에서 세계 랭킹 4위인 알렉산더 즈베레프(21·독일)를 접전 끝에 꺾으며 불이 붙은 기세를 그대로 살려 '대어'를 잡았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세트스코어만 보면 3대0(7대6<7대4> 7대5 7대6<7대3>) 완승처럼 보이지만 경기 시간이 3시간22분에 달할 만큼 어려운 싸움이었다. 시작이 좋았다. 정현은 1세트 초반 조코비치의 서비스게임을 두 번이나 브레이크하며 4대0으로 앞서나갔다. 하지만 이후 조코비치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동점을 허용했고, 결국 타이브레이크 끝에야 첫 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어진 2세트 역시 7대5로 팽팽한 경기 끝에 겨우 승기를 잡았고, 3세트에도 또 타이브레이크까지 이어지는 혈전을 벌인 뒤에야 경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단 한 세트도 쉽게 넘어간 경기가 없던 것이다. 조코비치의 범실로 경기가 끝난 뒤 정현은 부모님과 코치진이 있는 플레이어 박스에 큰절을 올리며 기뻐했다.
코트 위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는 결과"라며 운을 뗀 정현은 조코비치보다 더 좋은 샷을 쳤다는 말에는 "조코비치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를 따라한 것뿐"이라며 겸손한 답을 했고, 두 세트를 먼저 따낸 뒤에는 어떤 기분이었느냐는 질문에도 "조코비치보다 젊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어 더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며 관중들을 웃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어 정현은 한국말로 "늦은 시간까지 응원해주신 팬들에게 감사하다. 대회가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 응원해달라"는 소감을 남겼고, 카메라에 사인 요구를 받자 "보고 있나?"라는 당찬 문장까지 적은 뒤에야 코트를 떠났다.
물론 이번 대회에 복귀한 조코비치의 컨디션이 100%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윔블던 이후 팔꿈치 부상으로 휴식기를 보냈던 조코비치는 이날도 보호대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섰고, 쉬는 시간에는 팔꿈치 치료를 받는 등 전반적으로 나쁜 몸 상태를 보여줬다. 1세트에 무려 7개의 더블폴트를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컨디션 난조는 입증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현이 이번 대회 최고 이변의 주인공임은 부정할 수 없다. 지난해 11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우승으로 생애 첫 승을 거두더니 올해 초부터 네빌 고드윈 코치(43·남아공)와 함께하며 약점으로 꼽히던 서브와 포핸드까지 교정한 정현은 이전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세계 테니스 판도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정현은 이번 승리로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 8강 진출만으로도 44만호주달러(약 3억8000만원)에 복식 16강으로 받은 2만9500호주달러(약 2100만원)까지 4억원이 넘는 상금을 확보했고, 이형택(은퇴)이 보유한 한국인 최고 순위 36위까지도 넘어설 가능성이 생겼다.
물론 대회가 진행 중인 만큼 지금까지 성적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줄곧 상위 랭커들과 만나야 했던 정현은 이제 24일 자신보다 순위가 낮은 테니스 샌드그렌(27·미국)과 4강전 티켓을 두고 결전을 치를 예정이다. 샌드그렌 역시 세계 랭킹은 97위에 불과하지만 세계 5위 도미니크 팀(25·오스트리아)을 세크스코어 3대2로 꺾은 또 다른 이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정현은 지난 9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TP투어 ASB클래식에서 샌드그렌에 2대1(6대3, 5대7, 6대3)로 승리한 바 있다. 또한 만일 4강에 오르게 된다면 이후에는 세계 랭킹 2위인 로저 페더러(37·스위스)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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