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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좋은 엄마’ 이상과 현실 사이, 드라마로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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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호주 드라마 <렛다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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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한 지 2개월이 지난 오드리(앨리슨 벨)의 삶은 총체적 난국이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출산의 후유증은 여전히 오드리를 괴롭히고 있고, 밤마다 보채는 아기는 차에 태워 밤새 드라이브를 해줘야 비로소 잠이 든다. 겨우 재운 아기 옆에서 실신하듯 잠들었다가, 마약상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남편 제러미(덩컨 펠로스)는 직장 일에 치이느라 큰 도움이 못 되고,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려니 미덥지가 못하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육아교실에 나가보지만, 하나같이 육아에 능숙해 보이는 엄마들 사이에서 자괴감만 커질 뿐이다. 아기만 낳으면 자연스럽게 엄마가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드라마 <렛다운>(The Letdown)은 초보 엄마의 애환과 성장통에, 모성 신화의 허구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버무린 코미디다. 생각해보면 기존의 육아 소재 코미디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육아에 서툰 아빠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에는 웃고 넘어가지만, 엄마들이 육아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에는 비난부터 하고 보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성들의 육아는 예능인데, 여성들의 육아는 다큐멘터리’라는 말이 괜히 나오겠는가. 누구도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쩔쩔매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엄마들은 위대해야만 하니까. 과도한 모성 예찬 뒤에는 미처 공론화되지 못한 무수한 고통의 언어가 있다.

<렛다운>의 탁월한 점은, 사회적 금기에 가까웠던 엄마들의 고충에 작정하고 현미경을 들이대고, 때론 원경으로 바라보면서 그 억압과 부조리를 풍자하는 여유까지 지녔다는 데 있다. 주인공 오드리는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엘리트 여성이다. 출산 전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자연분만 서적을 독파했고 그 결과 출산 때 아이와 그녀 둘 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출산 뒤에도 내내 ‘좋은 엄마’라는 이상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평소 육아서적은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이고 육아는 자기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몰래 육아 책을 구매하는 모습을 육아교실 동기에게 들키는 장면은 오드리의 분열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엄마들은 임신한 이후부터 수많은 감시와 평가의 시선에 둘러싸인다. 오드리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고 커피를 마시면서 모유 수유를 하다가 경멸의 시선을 받고, 늦은 귀갓길에 택시를 타려다가 아기를 데리고 택시를 타는 건 불법이라는 충고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길에서 마약을 파는 남자마저 그녀에게 ‘좋은 수유 자세’에 대해 충고할 정도다. <렛다운>은 그처럼 여성에 대한 지원은 없는데 간섭과 억압만 많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생존 드라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상황을 이보다 잘 보여준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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