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018 860건 징계, 복직·재취업 무려 299건 '제2 피해 불씨'
체육시민연대 "징계사항, 채용 및 재계약시 반드시 첨부토록해야"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철인3종선수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이 열린 가운데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박해묵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지난 20년간 수없이 반복돼온 체육계의 폭력·가혹행위 사건에는 ‘솜방망이 징계’도 큰 원인을 차지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를 일으켰던 지도자들이 퇴출되지 않고 버젓이다시 현장에 복귀하니 “아무리 신고해봐야 현실은 요지부동”이라는 자조가 체육계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사건 가해자가 완전히 체육계에서 퇴출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치·선배가 무서워요” 집단괴롭힘·금품요구로 반복돼온 극단적 선택=체육계에서 지도자 또는 선배 선수들의 가혹 행위로 사망에 이르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은 지난 20년간 수없이 반복돼왔다. 지난 2003년 대학진학을 앞둔 고등학교 야구선수 A모 군이 훈련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합숙을 시작하자마자 여자친구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선배들의 집단 따돌림이 문제였다. 지난 2013년 경기도의 한 야구 명문고의 B모 선수는 “코치·선배가 무섭다”는 유서를 남겨두고 투신했다. 코치가 그를 괴롭혔던 건 촌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밝혀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쇼트트랙·컬링 등 동계스포츠 종목 선수들의 피해 고발을 계기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에 응한 1251명의 실업팀 선수들 중 “언어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한 선수는 424명으로 33.9%를 차지했고, 신체폭력을 경험한 경우는 326건(26.1%)으로 집계됐다.
문제 제기가 반복되는데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도 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여성 선수들이 겪는 성폭력 피해가 특히 그렇다. 지난 2007년과 2019년 프로와 실업팀 여성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피해 실태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항목에서 피해 실태가 유사했고, 오히려 심각해진 경우도 있었다.
‘운동 중 누군가 나에게 불쾌할 정도의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는 행위가 있었나’라는 질문에 2007년의 프로·실업팀 선수 중 5.0%가 “그렇다”고 응답했는데, 2019년엔 프로팀 선수의 7.8%, 실업팀의 8.4%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누군가 나의 특정 신체 부위의 크기나 모양, 몸매, 외모 등에 대한 성적 농담을 하는 행위’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2007년엔 9.9%, 2019년 19.5%(프로팀 선수), 10.5%(실업팀 선수)가 “그렇다”고 답했다.
▶피해 호소는 물론 증언하기도 어려운 현실=스포츠계에서는 이같은 피해가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로 ‘피해 사실을 신고할 수 없는 환경’을 지목한다. 위 조사에서 신체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선수 중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이가 67%에 달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2.7%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도움을 청한 6건 중 폭력 행위가 중단됐던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했다.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이전에 문제의식 없이 마음 놓고 폭행하던 지도자들도 이제 주위 시선에 한 번 더 눈치를 보는 등 경각심을 갖는 것 같다”면서도 “그러나 ‘뭐가 개선됐는지 모르겠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계속 나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사람들이 적어 여전히 고립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피해 선수뿐 아니라 증언을 해줄 주변 선수들의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숙현 선수 사건에서는 가해 선배 중 한명으로 지목된 김도환 선수를 들 수 있다. 김 선수는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최숙현 선수에 대한 폭행을 인정하면서도, 자신 역시 김규봉 감독의 폭언·폭행의 목격자이자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김은희 코치는 “피해를 호소하는 선수들뿐 아니라 목격자·증인들도 폭행에 노출된다. 증인들조차 보호받지 못하니까 피해자 편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피해자가 폭로를 해도 증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사건을 해결할 수 없고 역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단체 등에 상담을 받다가도 결국에 문제제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대표는 “최근 한국체대 선수의 학부모가 찾아와 가혹행위에 대해 하소연하고 언론에 제보하려 했지만 보복과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으로 포기했다”고 전했다.
▶“징계받아도…34%는 복직·재취업”= 체육계에서 반복되는 이같은 문제에는 ‘유명무실 징계’도 적지않은 몫을 차지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취재결과 폭력이나 비위 사건으로 체육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지도자가 징계 이후 현장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상당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18년 대한체육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체육회나 협회의 스포츠공정위를 통한 징계를 받은 후 복직하거나 유관 기관으로 재취업한 사례가 적지않았다. 2013~2018년 사이 860건의 징계가 내려졌는데 복직·재취업 사례가 299건에 달했다. 징계기간 중 불복 소송을 하면서 복직·재취업한 사례도 24건이나 됐다.
지도자가 징계를 받더라도 이사회가 징계를 해제해 체육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야구 지도자 C모씨는 지난 2010년 선수 폭행을 이유로 자격정지 5년 처분을 받았지만 3년만인 지난 2013년 징계가 해제됐다. 그는 현재 지방 고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징계 해제는 폭력으로 인한 징계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3년 금품수수를 이유로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자격정지 3년 처분을 받은 지도자 D모 씨도 바로 이듬해인 2014년 징계가 해제됐다. 그 역시 지방 한 중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징계 처분 기간이 끝나기만 하면 학생 선수들을 지도해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지난 2016년 폭력 문제로 자격정지 1년 처분을 받은 E모씨는 경기 지역 체육회 소속으로 학교 운동부 지도자 파견을 나갔다. 선수폭행·성추행·성희롱 등을 이유로 대한수영연맹으로부터 자격정지 6개월 처분을 받았던 지도자 F모씨는 현재 서울 소재 한 중학교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고(故) 최숙현 선수에게 폭언·폭행을 한 혐의를 받는 김규봉 감독과 주장 장윤정 선수, 김도환 선수의 경우 징계 여부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대한철인3종협회로부터 각각 영구제명과 10년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이들이 재심을 청구해 오는 29일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징계 수위가 확정된다.
최숙현 선수 사건처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 가해 선수나 지도자가 청구한 재심이 기각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체육회 공정위는 훈련 중 동성 선수를 성희롱한 혐의로 징계를 받은 임효준 쇼트트랙 국가대표, 후배 선수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 이승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학부모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정종선 전 고등축구연맹 회장 등의 재심을 모두 기각했다.
재심이 기각돼 징계가 확정돼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자컬링 국가대표 김은정 선수는 지난 20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김민정 경북체육회 감독은 2019년 면직 당했으나 소송을 진행하면서 금년까지 경북체육회 이사로 등록돼 있었고, 김경두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 장반석 경북체육회 감독에 대한 징계도 이뤄진 바 없다”고 말했다.
▶“자격정지·이력 조회 폭력 가해자 체육계 퇴출 노력해야”= 이처럼 유명무실한 징계가 실질적으로 가해자에게 처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스포츠공정위원회 제40조에 따르면 자격정지 이상의 징계 결정사항은 체육정보시스템에 지체없이 등록해 체육단체 활동을 제한해야 하지만 2013~2018년 실제 회원종목 징계등록 대상 286건 중 적정기간인 3개월 이내에 등록한 경우는 37건(12.9%)에 불과했다.
대한체육회는 이르면 이달 말쯤 열릴 차기 이사회에서 폭력·성폭력 등으로 징계를 받은 지도자는 징계기간이 끝나도 체육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대한체육회 측은 징계 중 체육계로 돌아가는 관행에 대해 “국민체육진흥법상 체육지도자 자격이 취소된 사람은 그 자격증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반납하도록 돼있지만 사실상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철인3종선수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이 열린 가운데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박해묵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대표는 “징계 사항을 체육정보시스템에 올리기만 할뿐 아니라 채용이나 재계약할 때 반드시 첨부하게 하는 방식으로 징계가 유명무실한 제도가 아니라 ‘밥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는 지난 20일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고(故) 최숙현 선수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큰 슬픔을 주는 동시에, 이 엄혹한 한 시대를 마감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뛰어 넘을 우리의 응답은 그래서 늘 그랬듯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addressh@heraldcorp.com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