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격파’ 유남규 감독·유예린 선수
2024년 12월 2일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만난 유남규 탁구 감독과 딸 유예린. 딸은 "아버지처럼 강한 승부욕을 길러 아시안게임,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고, 아버지는 "앞으로는 '유남규의 딸' 유예린보다 '유예린의 아빠' 유남규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김지호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25일 한국 탁구에 낭보가 하나 날아왔다. 여자 주니어 대표팀이 스웨덴 헬싱보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중국과 대만을 연파하고 정상에 오른 것. 대회 7연속 우승을 노리던 중국을 성인·주니어 통틀어 (남북 단일팀을 제외하곤) 세계 대회 단체전에서 처음 이겼기에 의미가 각별했다. 난공불락으로 통하던 중국을 준결승에서 만나 게임 점수 3대2로 제쳤다. 그 극적 드라마의 주역은 유예린(16·화성도시공사 유스팀). 첫 번째 게임과 마지막 다섯 번째 게임을 모두 잡아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다.
유예린은 한국 남자 탁구 레전드인 유남규(56) 한국거래소 탁구단 감독의 외동딸이다. 유 감독은 고교생이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세계 1위 장자량과 후이준 등을 차례로 누르고 개인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이제 대를 이은 ‘중국 킬러’가 탄생한 셈이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부녀를 만났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 날이다. 유예린은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단체전이라 부담도 되고 긴장도 많이 했는데 그걸 이겨내고 우승해 기분이 좋았다”면서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했다.
“부담되거나 긴장될 땐 항상 아빠가 해주는 말을 떠올려요. 때론 새벽에도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누죠. 아빠가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연습을 충분히 했으니 잘할 거다. 하던 대로만 하면 중국을 이길 수 있다’고 하셨죠.”
유예린은 탁구 유전자를 물려받은 듯하다. 활동적인 성격으로 키워주려고 어렸을 때부터 여러 운동을 시켰는데 못하는 게 없었다고 한다. 연령별 전국대회에서 꾸준히 정상에 서면서 만 14세이던 2022년 16세 이하 대표 선수로는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2022년 WTT(월드테이블테니스) 유스 베를린 대회와 2023년 카타르, 2024년 튀니지 대회에서 우승했다. 올해는 두세 살 위 선수와 경쟁한 19세 이하 알제리 대회에서도 단식 챔피언에 올랐다. 11월 현재 19세 이하에서도 여자단식 세계 3위, 혼합복식 1위다.
“다섯 살 때였나요? 혹시 탁구에도 재능이 있을까 고무줄에 탁구공을 달아놓고 쳐보라고 라켓을 건네줬는데 그 리듬을 너무 잘 맞췄어요. 하지만 애 엄마는 운동 말고 다른 쪽으로 관심 갖길 원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취미 삼아 하라고 탁구를 가르쳤는데 1년 만에 상대를 다 이겨버렸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선수 길을 걷고 있네요.”(유남규)
“사실 처음엔 탁구보다 피겨가 하고 싶었어요. 김연아 언니 따라서. 선수 한번 해보라는 권유도 받았죠. 평일엔 탁구, 주말에 피겨를 배웠는데 탁구가 성적이 더 잘 나왔어요. 결과가 좋으니 점점 연습이 재미있어졌죠. 처음엔 아빠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는데 커 가면서 실감하고 있어요. 멘털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셔서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잔소리 좀 줄이셨으면 좋겠어요. 경기 전에 예민해지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라도 똑같은 말을 계속 하실 땐 너무 힘들어요(웃음).”(유예린)
선배로서 또 아버지로서 딸을 지켜보는 유 감독 마음은 두 갈래다.
“저는 현역 시절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동하면서 혼자 새벽 운동 두 번 하고, 훈련이 끝나도 밤 10시까지 남아서 훈련했어요. 예린이도 독하게 노력하길 원하죠. 그러면서도 승부에 집착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 탁구를 하면서 행복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기도 해요.”
그러면서 “예린이가 승부욕이 좀 부족했는데 요즘 점점 더 생기는 것 같다. 이기든 지든 한 번 상대한 선수들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모습이 현역 시절 나를 빼닮았다”고 덧붙였다.
유 감독은 우승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중국 탁구가 강한 이유는 예린이 나이 또래 선수들을 성인 대표와 함께 훈련시키면서 기량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그러질 못해서 중요할 때 성장이 멈춘다. 그래서 앞으로 예린이에게 개인 코치도 붙이고 파워와 스피드가 좋은 남자 오빠들과 함께 훈련시킬 생각”이라고 했다. 중학 졸업 후 일반계 고교 대신 부천상동고 부설 방송통신고로 진학한 유예린은 평일엔 아버지 팀인 한국거래소 선수들이 훈련하는 인천계양체육관이나 소속팀 화성도시공사 유스팀 훈련장에서 땀을 흘린다.
유예린의 꿈을 그릴 도화지는 아직 미완성이다. 여백이 많다. 당장 내년 1월 대표 선발전에서 10위 안에 들어 성인 국가대표가 되는 게 일차 목표. 그래야 2026년 아시안게임, 2028년 LA올림픽 출전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고, 부녀 올림픽 동반 금메달이라는 고지를 넘볼 수 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일단 끈기를 길러야 해요. 뒤지고 있을 때 쉽게 포기하거든요.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결정구를 만들어야 하고, 리시브도 가다듬어야죠. 서브도 몇 년째 한 가지라 상대가 대처하기 쉬워요. 힘들더라도 반복 훈련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가끔 친구들하고 롯데월드도 놀러 가고 싶지만 남들과 똑같이 생활하면 나아질 수 없으니 나중을 위해 미루고 있어요.”(유예린)
유 감독은 “예린이는 나 못지않은 훈련 벌레다. 언젠가는 성인 무대에서 중국을 누르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어 ‘유예린의 아빠’ 유남규로 불릴 그때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호철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