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현기 기자)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국가대표팀에선 한솥밥을 먹더라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는 각자의 소속팀 유니폼을 입고 나오는 무대다.
그런데 한국 선수가 상대팀 다른 한국 선수의 페널티킥 방향을 소속팀 골키퍼에게 알려줬고, 결과적으로 그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돌아온 것은 악플이었다. "한국 선수끼리 한 골씩 넣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 아니 아쉬움 넘어 비난 수준의 반응이 나왔다.
이건 아니다. 서로 소속팀 선수로 최선을 다한 결과였을 뿐이다.
손흥민이 5년 만에 페널티킥을 실축해 화제가 된 가운데 상대팀 공격수 황희찬이 때 아닌 악플에 휩싸였다. 손흥민이 페널티킥을 못 넣었는데 왜 황희찬이 비난을 받을까.
사연은 이렇다. 손흥민이 주장을 맡고 있는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황희찬이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울버햄튼은 30일 영국 런던 토트넘 홋스퍼 경기장에서 2024-2025시즌 프리미어리그 19라운드 맞대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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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전반 43분 토트넘이 페널티킥을 얻어내 손흥민이 찼는데 킥하기 직전 황희찬이 같은 팀 골키퍼 조세 사를 향해 왼팔을 크게 들어 신호를 보냈다. 사는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손흥민의 묵직한 슈팅을 완벽하게 쳐냈다.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5년 만에 페널티킥을 성공하지 못했다.
울버햄튼은 함박 웃음을 지었다. 울버햄튼 지역지 '몰리뉴 뉴스'는 31일 "황희찬이 토트넘 홋스퍼와 경기, 손흥민의 페널티킥 상화에서 보여준 행동이 화제다"라면서 "황희찬이 사에게 오른쪽으로 다이빙하라고 손짓했다. 황희찬은 필사적으로 손을 들어 방향을 알렸다. 드라구신이 황희찬을 제지하기 위해 팔을 끌어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사는 황희찬이 왼쪽 팔 흔든 것을 봤다.
몰리뉴 뉴스는 "황희찬은 한국 국가대표로 함께 뛰어서 손흥민을 잘 알 고 있다. 황희찬은 대표팀에서 손흥민이 왼쪽 아래로 페널티킥을 차는 모습을 자주 봤을 것이다"고 했다.
대표팀에서 함께 생활하는 황희찬이 손흥민의 킥 습관을 잘 알다보니 토트넘과의 승부에서 큰 도움을 줬다는 뜻이다.
운명이 참 묘하다. 둘은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 포르투갈과의 승부에서 한국의 월드컵 원정 대회 사상 두 번째 16강 진출을 합작한 사이다. 손흥민이 후반 추가시간 돌입 직전 60m 드리블을 한 뒤 패스를 넣어줬고, 이를 1~2차전에서 부상으로 신음하다가 훌훌 털고 일어선 황희찬이 오른발 슛을 쏴 결승포 주인공이 됐다.
둘은 한 때 같은 에이전트를 두기도 했다. 그 만큼 친하지만 각자 소속팀 유니폼을 입고는 냉횩하게 치고받았다.
이날 맞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팽팽한 경기였다. 전반 7분 울버햄튼 공격수 황희찬이 아크 정면에서 그림 같은 통렬한 오른발 감아차기로 선제골을 터트렸고, 토트넘도 이에 질세라 5분 미드필더 로드리고 벤탄쿠르가 동점골을 넣었다.
전반 추가시간 토트넘 윙어 브레넌 존슨이 역전골을 터뜨려 토트넘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후반 막판 원정팀 스트라이커 예르겐 스트란 라르센이 재동점골을 넣어 2-2로 경기 종료됐다.
이날 경기는 황희찬과 손흥민이 모두 선발 출전하며 코리안 더비로 진행됐는데, 서로 다른 두 한국인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처음으로 함께 골을 넣는 기록을 세울 뻔했다.
전반 42분 존슨이 얻어낸 페널티킥 때 손흥민이 키커로 나섰기 때문이다.
결과는 실축이었다. 손흥민이 이를 실축하면서 코리안 더비에서 한국인 선수 2명이 모두 골을 넣는 장면은 볼 수 없게 됐다. 토트넘이 손흥민의 페널티킥 성공으로 2-1 리드를 쥐었다면 좀 더 유리한 국면으로 경기를 펼칠 수도 있었지만 황희찬의 '왼팔'이 이를 저지했다.
페널티킥 선방으로 무승부를 이끈 사는 경기 후 황희찬을 격하게 끌어안으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페널티킥 실축으로 고개를 떨군 손흥민은 이날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후반 19분 티모 베르너와 교체돼 경기를 마쳤다.
이런 식으로 코리안 더비에서 한국인 선수가 같은 팀 골키퍼에게 페널티킥 키커로 나선 상대팀 한국인 선수의 킥 방향을 알려준 경우는 9년 전에도 있었다.
손흥민은 과거 바이엘 레버쿠젠에서 뛸 때로 토트넘 이적 직전이던 2015년 구자철(당시 마인츠)의 페널티킥을 막기 위해 골키퍼에게 손짓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손흥민은 키커 기준 오른쪽으로 뛰라고 손짓했고, 골키퍼가 오른쪽으로 뛰었지만 구자철이 반대편으로 차 성공했다. 구자철은 손흥민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고 페널티킥으로만 2골을 넣었다. 다만 승리는 레버쿠젠이 가져갔다. 당시 손흥민은 "내가 사인 보내는 것을 알고 (구자철이)반대로 찬 것 같다"고 했다.
과거 구자철의 페널티킥을 막는 데 실패했던 손흥민은 이번엔 후배 황희찬에게 당하며 페널티킥을 그르친 셈이 됐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알린 백미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황희찬의 SNS에선 '큰 불'이 났다. 일부 몰지각한 축구팬들이 황희찬을 야단(?)친 것이다.
"손흥민 킥 방향 알려주는 영상보고 헉 했다", "실망스러움...페널티킥 뒤에서 방향을 제시하는거...아무리 프로지만서도 같은 동료였는데...실망이야" 등 실망감을 드러내는 댓글이 홍수를 이뤘다. 여기까지는 아쉬움에서 나오는 의견으로 볼 수도 있다.
"이걸 가르쳐주다니, 민족의 배신자", "다 좋은데 손흥민주장님의 골차는 방향은 골키퍼에게 알려주지 마세요. 페어 플레이 합시다. 이건 퇴장 받아야할 반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아쉬움에서 나오는 발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댓글들이 홍수를 이뤘다.
황희찬은 황희찬대로, 손흥민은 손흥민대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코리안 더비'가 빚어낸, 어쩌면 흥미진진한 장면이 살벌한 악플로 인해 흠집이 나고 말았다.
사진=연합뉴스 / 유튜브 /중계화면
김현기 기자 spitfire@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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