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5위에 오른 차준환. 한국 선수가 올림픽 톱5에 든 것은 김연아 이후 8년 만이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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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위에 선 그는 한 마리 새 같았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빙판 위를 날아올랐다. 첫 번째 점프에서 작은 실수가 나왔지만, 그건 옥에 티일 뿐이었다.
차준환(21·고려대)이 10일 중국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베이징 겨울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93.59점, 예술점수(PCS) 90.28점, 감점 1점으로 182.87점을 기록했다. 개인 최고점(175.06점)과 올 시즌 최고점(174.26점)을 단숨에 넘어서는 좋은 성적이다. 지난 8일 쇼트프로그램에서 99.51점(4위)을 받았던 차준환은 합계 282.38점을 기록하면서 24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5위에 올랐다. 그는 이날 깔끔한 연기를 펼치면서 지난달 우승한 4대륙 선수권에서 세운 개인 최고 기록(273.22점)도 가볍게 갈아치웠다. 또 김연아(2010 밴쿠버 금메달, 2014 소치 은) 이후 남녀를 통틀어 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네이선 첸(미국·332.60점)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은메달과 동메달은 일본의 가기야마 유마(310.05점)와 우노 쇼마(293.00점)가 차지했다. 3연패에 도전했던 하뉴 유즈루(일본·283.21점)는 4위에 그쳤다.
차준환은 첫 올림픽 도전인 2018 평창 대회에선 15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는 10위 이내 진입이 현실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브라이언 오서(캐나다) 코치는 훈련을 치르면서 “톱6도 가능하다”고 했다. 차준환은 오서의 기대대로 벽을 넘어섰다.
차준환 프리스케이팅 세부 점수표 |
차준환은 이날 프리스케이팅 배경 음악으로 ‘투란도트’를 선택했다. 피겨스케이팅에선 주로 목소리보다는 악기를 사용한 곡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차준환은 투란도트의 주인공 칼라프가 부르는 아리아 ‘모두가 잠들지 못하리라(Nessun Dorma)’가 포함된 곡을 골랐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폴 포츠가 불러 유명해진 그 음악이다.
차준환은 첫 번째 점프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쿼드러플(4회전) 토루프를 시도했으나 착지에 실패하면서 넘어졌다. 당황할 법도 했지만, 다시 힘을 낸 차준환은 침착하게 연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점프(쿼드러플 살코)를 완벽하게 성공했다. 콤비네이션 점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도 실수 없이 수행했다. 이후에도 차분하게 구성 요소를 하나씩 풀어냈다. 목표였던 ‘클린’엔 실패했지만, 세계적인 스케이터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아름다운 연기였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배경인 베이징에서 멋진 연기를 펼친 차준환은 첫 점프 실수 탓인지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당당하게 링크를 빠져나갔다.
차준환은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스케이팅 연기 모두 개인적으로 만족한다. 첫 점프에서 생각보다 세게 넘어졌다. 아쉬운 실수가 나왔지만, 남은 요소를 더 잘 수행하면서 앞의 실수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목표를 어느 정도 다 이룬 것 같다. 개인 최고점을 세우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고, (순위는) 톱10에 드는 것도 목표였다. 많은 분이 쇼트프로그램 이후에 메달권까지 기대를 하셨을 텐데, 오늘 경기를 그래도 잘 마쳤다. 앞으로 기대할 수 있도록 마무리하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차준환 프리스케이팅 세부 점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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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때 피겨를 시작한 차준환은 어릴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으로 불렸다. 일찌감치 3회전 점프를 모두 마스터했다. 아이돌 같은 외모의 차준환은 TV 광고 모델과 아역 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연기 경험은 물론 어렸을 때 배운 음악, 현대 무용을 통해 표현력을 키웠다.
중학교 3학년 때인 2016년엔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주니어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최연소 쿼드러플 점프에도 성공했다. 2015년부터는 김연아를 지도했던 오서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첫 올림픽인 2018 평창 대회에선 한국 남자 싱글 최고 성적인 15위에 올랐다.
세계 피겨의 흐름은 최근 급격히 바뀌었다. 채점 기준이 바뀌면서 선수들은 기본점수가 높은 고난도 점프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2018 평창올림픽부터 쿼드러플 점프 횟수가 늘어났다. ‘점프 머신’으로 불리는 첸은 쇼트에서 2번, 프리에서 5번 4회전 점프를 시도한다. 점프보다 연기에 강점이 있는 차준환으로선 달갑지 않은 변화다.
차준환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강점인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힙합댄스를 배웠다. 노래까지 연습해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출연하기도 했다. 점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근력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코어 강화를 위해 복싱까지 배웠다. 그 결과 베이징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4회전 점프를 3회(쇼트 1회, 프리 2회)나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올림픽 무대인 베이징올림픽 준비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오서 코치가 있는 캐나다로 건너가지 못했다. 2020~21시즌엔 국제 대회에도 거의 나서지 못했다. 국내 스케이트장이 문을 닫는 통에 지방을 돌아다녀야 했다. 차준환은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서 코치님과는 1년에 한두 번 만난 게 전부”라고 했다. 하지만 차준환은 “더욱 피겨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애 두 번째 올림픽에서 한국 피겨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차준환의 도전은 베이징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겨는 20대 중반까지 충분히 현역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4년 뒤 이탈리아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에선 더 큰 꿈에 도전할 예정이다. 차준환은 “앞으로 4회전 점프 횟수를 늘리고 실수를 줄이는 게 목표이자 숙제”라고 말했다.
베이징=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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