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종의 자식을 손자 대신 백마강에 빠져 죽게 한 지 3년이 흘렀다.
“신의 손자 봉상이 명을 어기고 도망했는데, 미처 죄를 자수하지 못하고 있던 차 지아비의 아우 익명이 알려오기를 성상께옵서 죄를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벼슬까지 주셨다 하옵니다. 이제 봉상이 재생을 얻었으니 천지의 어짊과 하해(河海)의 큼으로도 그 은혜에 견줄 수 없겠나이다.”(‘김씨 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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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이명 사약 받고 죽자
고모 이씨, 조카 대신 죽도록 종 설득
할머니 김씨는 왕에게 두 차례 상언
구사일생 손자 종상은 평생 은둔
남성들의 당쟁에 여성들도 휘말려
명분 내세웠지만 목표는 권력 쟁취
할머니 김씨, 김만중의 딸
이이명의 아내 김씨가 영조에게 보낸 상언(한글 상소 글). [사진 한글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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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이봉상의 죄를 용서하고 참봉 벼슬까지 준 임금에게 상언(上言)으로 저간의 사연을 호소한 김씨는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의 딸이자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이이명(李頤命·1658~1722)의 아내다. 김씨는 손자와 함께 대궐 앞에 나아가 준비된 상언을 올리며 석고대죄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죗값을 받겠다는 취지다. 즉 임금이 용서를 한 사건이지만 법을 어긴 자는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여성이나 하층민이 사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던 상언은 언문으로 작성되는데, 공적인 주장을 담은 한문 상소(上訴)와 구분되었다. 그러면 김씨는 손자 봉상을 통해 무슨 죄를 지었나. 이어지는 김씨의 상언을 따라가 보자.
“망부(亡夫)는 한 아들 기지(器之)를 두었습니다. 이기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맹인으로 폐인이 되었고 봉상만이 후사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화란이 일어나던 날 봉상은 겨우 16세였는데, 왕부(王府)에서 수노적산(收孥籍産·가족을 노비로 만들고 가산을 몰수)한다는 조처가 내려왔습니다. 신이 어떻게 일신(一身)에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여 양대를 지나 하나 남은 핏줄을 보존시키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이이명(1658~1722) 초상. [사진 이숙인] |
김씨의 상언은 신임옥사(경종 1년과 2년)를 배경으로 한다. 숙종 말에 이르면 세자(경종) 편에 선 소론과 연잉군(영조) 편에 선 노론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대립하는데, 결국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이 즉위하였다. 새 왕이 즉위하자 노론은 다시 세제(世弟) 책봉과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며 정국을 흔들었고, 소론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옥사를 일으킨다. 여기서 김씨의 남편 이이명과 김창집·이건명·조태채의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사사되고, 이이명의 아들과 조카, 김창집의 아들과 손자 등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당시 국청에서 처단된 자가 50여 명에 이르는 등 유배를 당하거나 이 사건에 협조한 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는 200여 명에 달했다.
일시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가운데 칠순을 바라보는 김씨는 더 근원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이대로 집안의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가문을 이을 핏줄로 손자 하나 남았는데, 관노로 끌려가면 목숨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한 자식을 보전치 못하였는데, 하늘이 차마 이 손자마저 죽이리오. 저가 한갓 죽기를 아껴 이 일로 골육을 보전치 못한 즉 죽어 망부를 보지 못할지라. 하여 자부를 보고 이르되 이 아이 이 땅을 떠나게 하여 살기를 도모한 즉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럴 즈음 마침 집의 종이 나이며 얼굴이 봉상과 방불한지라 문 아래 강이 있어 죽을 뜻으로 말하니, 종이 강개하여 사양치 아니하고 강에 빠져 죽으니 이것은 자못 하늘이 시키신 바온지라. 이 밤에 일어난 일을 아비 무덤가에 있던 봉상에게 가만히 기별하여 심산궁곡으로 돌아가게 하였나이다.”(김씨 상언)
손자 닮은 어린 종 3일간 설득
이이명 아내 김씨의 부친은 『구운몽』을 쓴 김만중이었다. 김만중(1685~1686) 초상화. [사진 이숙인] |
김씨 상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종을 대신 죽게 한 계책은 김씨의 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이명과 김씨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그 넷째 딸이 김창업의 며느리이자 김신겸의 아내 이씨 (1692~1724)다. 옥사 당시 오빠 이기지가 가장 먼저 체포되는데, 이씨는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 모친과 오빠의 처자식을 보호하고 홀로 본가로 가서 문적(文籍)을 수습하였다. 또 의금부 도사가 조카 봉상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봉상을 닮은 어린 종을 3일 동안 설득하여 대신 죽을 허락을 받아 내었다. 관아에서 주검을 검안(檢案)할 때에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딸 이씨의 힘이었다.(‘완산이씨묘지명’)
한편 도망간 이후 종적을 감춰 생사 마저 알 수 없었던 이봉상이 영조가 즉위하자 조모 김씨의 귀양지 부안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무주에 숨어 살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청풍 부사로 있는 시동생 이익명에게 이봉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후의 일을 상의한다. 형의 손자 봉상이 죽은 줄 알았던 이익명은 형수의 전갈을 받고 바로 상소하여 이봉상을 찾아 임금 앞에 자현(自現)케 할 것을 아뢴다. 임금은 이봉상이 도망했던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벼슬을 내린다. 자신을 지지했던 영의정 이이명의 손자라는 사실이 작용한 것이다. 임금은 김씨의 상언에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라고 한다. 도망할 때 16세이던 이봉상은 19세가 되어 있었다. 왕은 봉상 대신으로 죽은 가동(家僮)에 주목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도 드문 일이다. 전례를 상고하여 포상하도록 하라.”(영조 1년 5월 9일)
‘이봉상 도망 사건’을 일으켜 완산 이씨 이이명의 가문을 지킨 사람들은 집안의 여자들이었다. 상언의 주인공 광산김씨 부인과 자부 하동정씨, 손부 안동김씨, 김씨의 딸 완산이씨가 그들이다. 노론의 최고 명문가에서 차출된 여성들이다. 이 여인 3대는 편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종손을 지켜내었다. 그들은 영조 즉위와 함께 이이명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부안의 귀양살이 3년 만에 부여로 귀환한다. 게다가 손자 이봉상이 제대로 살아났으니 축배를 들 일만 남았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 김씨의 상언 글 실물 발굴돼
이이명의 손자 이봉상의 처 온양정씨의 정려각과 이봉상을 대신하여 죽은 충노의 비각.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에 있다. 이봉상의 첫 부인은 김창집 손녀로 43세에 죽고 재취 부인인 온양정씨는 이봉상이 죽자 따라 죽어 열녀로 정려되었다. [사진 이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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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 김씨의 상언이 있고 난 2년 후 이봉상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 봉상이 법을 피해 도망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시체를 바꿔치기 한, 전대에 없던 요악(妖惡)한 짓에 도리어 은전이라니 나랏법을 침범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영조 3년 9월 12일) 게다가 시동생 이익명은 봉상의 일을 사주한 자로 지목되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씨는 다시 붓을 든다. 1727년에 작성되는 2차 상언이다. 두 차례의 상언은 ‘봉상의 도망 사건’이라는 같은 사안에 근거하지만 2차는 손자와 시동생의 처벌을 막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김씨는 손자 이봉상을 도주시킨 것은 자신이며 시동생 이익명은 모르는 일이니 죄과는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김씨의 2차 상언과 1차 상언의 실물이 최근에 차례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내에 고모까지 사생결단으로 지키고자 했던 종손 이봉상. 할머니 김씨의 간곡한 상언에도 불구하고 23세의 그는 진도 귀양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6년을 보내고 이리저리 배소를 옮겨 다니다 유배 12년 만에 완전히 풀려난다. 그의 나이 34세, 고향 부여로 돌아온 이봉상(1707~1772)은 일체의 벼슬과 영예를 물리치고 66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은거로 일관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가해진 일들이 어이없게 느껴질 법도 하다.
멸족의 위기에 처한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여인 3대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도대체 당쟁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론과 노론이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자당(自黨)의 세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각 당이 국왕을 선택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당인(黨人)으로서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김씨의 남편 이이명만 하더라도 한편으로 4대신으로 추앙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4흉(兇)으로 평가되었다. 집안과 학맥으로 연결된 당파적 싸움에서는 여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의 자식을 바꿔치기하면서까지 내 혈손을 지키고자 한 여자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엄동설한보다 더 시린 아픔을 느낀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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