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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국보·세계 축구왕' 펠레, 천국의 그라운드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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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월드컵 최연소 득점·해트트릭 등 불멸의 기록

브라질 산투스서 인터콘티넨털컵·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등 숱한 우승

은퇴 후 체육부 장관 등으로 활동하며 브라질 축구개혁 주도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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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환성적인 오버헤드 킥 장면.
[A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배진남 기자 = 30일(한국시간) 향년 82세로 별세한 펠레는 '축구 황제'로 불릴 만큼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펠레는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소도시인 트리스 코라송이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다. '펠레'는 애칭이었는데 의미는 불분명하다. 펠레조차도 자서전에서 이름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펠레는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으나 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 돈지뉴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축구 선수의 꿈을 품었다.

펠레가 만 9세였던 1950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열렸다.

우승 후보로 꼽힌 브라질은 결승 라운드 우루과이와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정상에 오를 수 있었으나 1-2로 역전패 하는 바람에 우승을 놓쳤다. 브라질 축구에 이른바 '마라카낭의 비극'이었다.

펠레는 이 경기를 라디오 중계로 듣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겠다고, 우루과이에 설욕하겠다고 예수상 앞에서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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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와 결승에서 브라질 펠레(왼쪽)가 드리블하던 모습.
[AFP=연합뉴스]


유소년 시절 아마추어 축구클럽에서 재능을 키운 펠레는 아버지의 소속팀이었던 바우루AC의 유스팀에서 뛰게 됐다.

1956년에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인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추천으로 브라질 명문 산투스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의 만 15세였다.

펠레는 1957년 7월 '코파 로카'(Copa Roca)라는 이름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 정기적으로 벌이던 친선경기에서 브라질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비록 브라질은 1-2로 졌으나 펠레는 태어난 지 16년 259일 만에 득점을 기록해 아직도 브라질 최연소 A매치 득점자로 남아 있다.

펠레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이다. 월드컵 최연소 득점·멀티골·해트트릭·우승 등 불멸의 기록이 이때 펠레에 의해 쓰였다.

당시 키 168㎝에 만 17세 소년이었던 펠레는 옛 소련과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월드컵 데뷔전을 치르며 환상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전 세계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웨일스와 8강전에서는 브라질에 1-0 승리를 안긴 결승골을 터뜨렸다.

나아가 프랑스와의 준결승(5-2 승)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5-2 승)에서도 두 골을 몰아 넣으며 브라질이 사상 첫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데 일등 공신이 됐다.

펠레가 월드컵 무대에서 10번을 달고 활약한 뒤 등번호 10은 에이스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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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축구황제 펠레의 생전 모습.
[EPA=연합뉴스]


이후 펠레에게 유럽 명문 클럽의 유혹적인 제안이 이어지자 1961년 브라질 정부는 그를 '국보'로 정해 국외 진출을 막기까지 했다.

펠레는 1970년 멕시코 대회까지 월드컵 본선에 네 차례 연속 출전해 총 14경기를 치르는 동안 12골을 넣었다.

브라질은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부상으로 두 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나 대회 2연패를 이뤘고, 1970년 다시 정상에 올랐다. 월드컵에서 세 차례나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펠레뿐이다.

1966년 잉글랜드 대회에서 상대 팀 선수들의 살인적인 태클로 펠레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브라질은 4회 연속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수도 있다.

펠레의 부상을 계기로 1970년 월드컵에서는 레드·옐로카드 및 선수 교체 제도가 정식 도입되기도 했다.

펠레는 1971년 7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 친선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펠레의 A매치 통산 기록은 92경기 77골이다. 브라질 국가대표 통산 최다 골 기록으로 네이마르(파리 생제르맹)가 올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A매치 77번째 골을 넣어 펠레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펠레가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67승 14무 11패의 성적을 냈다.

펠레는 1974년까지 줄곧 산투스에서만 뛰면서 공식전 660경기에서 643골을 터트렸다.

단일 클럽 최다 골 기록이었으나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바르셀로나(스페인) 소속이던 2020년 12월 이 기록을 깨트렸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만 공식전 778경기에서 672골을 넣었다.

펠레는 이후 미국의 축구붐 조성에 힘을 보태고자 1975년 북미사커리그(NASL) 소속의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해 1977년까지 세 시즌을 더 뛰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득점 기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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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브라질 1부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들어보이던 펠레의 모습.
[AFP=연합뉴스]


펠레와 그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세계 기록인 1천283골(1천364경기)이라고 주장한다. 산투스에서도 1천91골을 넣었다고 집계한다.

하지만 친선경기와 투어 경기 득점이 상당수 포함된 데다 오래된 기록들의 정확성이 떨어져 산투스, 뉴욕 코스모스, 브라질 대표팀에서 뛸 때 작성된 총 757골이 국제스포츠통계재단(RSSSF)이 인정하는 펠레의 공식전 총 득점이다.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로 평가받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했다.

펠레는 산투스에서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콘티넨털컵과 남미 클럽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두 차례씩 우승했다.

. 브라질 1부리그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를 차지했고, 상파울루주 리그에서는 10회 우승 및 득점왕 11회를 달성했을 정도로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녔다.

펠레가 그라운드 안에서만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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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체육부 장관 시절 펠레(오른쪽)가 영국 축구전설 보비 찰턴 경과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AFP=연합뉴스]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나 1960년대 후반 소속팀 산투스가 해외 투어 일환으로 내전 중인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를 방문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치렀을 때 펠레를 보기 위해 48시간 전쟁을 멈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펠레는 은퇴 후에도 축구해설가, 친선대사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브라질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돼 최초의 흑인 장관으로 1995년부터 3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장관 재직 시 자유계약선수제 확대, 심판이익단체 결성 허용, 축구협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리그 창설 등의 내용이 담긴 브라질축구 개혁법안, 이른바 '펠레법'을 마련해 브라질 축구의 개혁을 주도했다.

펠레는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없음에도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뽑혔고,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축구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인 고(故)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함께 함께 2000년 FIFA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에도 뽑히는 등 발자취를 남겼다.

hosu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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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축구황제' 펠레 주요 기록
(AFP=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0eun@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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