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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남편 없는 세계의 여자들 [브라보 차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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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차정숙’ 포스터.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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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아내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일까. 무능하고 무심한 남편을 대신해 경제활동과 가사노동을 동시에 했던 오덕례(김미경)는 말했다. “여자한테 남편은, 남편이라서 귀한 게 아니라 애들 아버지라서 귀한 거야.” 비혼 상태로 아이를 낳아 기른 최승희(명세빈)에게 남편은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그는 혼외자인 딸 은서(소아린)에게 “아빠가 있는 온전한 가정을 꾸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주인공 차정숙(엄정화)만큼 이 작품 속 남편의 의미를 적확하게 설명한 이는 없다. 그는 노래했다. “남자는~ 여자를~ 너무나 귀찮게 하네.”

남편은 아내에게 귀찮은 존재다. 적어도 정숙의 남편 서인호(김병철)는 그렇다. 의대 동기인 자신을 깎아내리며 집안에 눌러 앉혔을 때, 정숙은 인호를 어려워했다. 인호가 자신에게 간 이식을 해주지 않으려고 잔꾀를 부렸을 때, 정숙은 인호에 실망했다. 인호가 남몰래 두 집 살림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 정숙은 인호 때문에 분노했다. 강렬한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후 정숙에게 남은 건 귀찮음이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 이혼 소송을 걸랄 땐 언제고 소장을 받자마자 “행간의 의미가 뭔지 몰라?”라며 기어코 자신을 후려치는 남편이 정숙은 그저 귀찮을 뿐이다.

남편 없는 세계의 여자들

SBS ‘내 남자의 여자’와 JTBC ‘부부의 세계’가 각각 작품 속 불륜남인 홍준표(김상중)과 이태오(박해준)를 뻔뻔하고 혐오스럽게 그려냈다면, ‘닥터 차정숙’이 서인호를 묘사하는 방법은 의도적인 비웃음에 가깝다. 서인호는 외도 사실이 까발려진 후 지질하고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애처로울 정도로 가장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시청자는 이런 서인호를 통해 가정의 보호자이자 의사결정권자로서의 남편 혹은 아버지가 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정숙이 의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이 가부장적 규범으로부터 탈출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마도 한 번쯤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은 가장을 자처하며 위력을 휘두르던 인호에게서 벗어나서야 실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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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드라이브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는 차정숙(왼쪽)과 전소라. ‘닥터 차정숙’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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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관계도에서 남자를 치워버린 여자들은 훨씬 풍성한 감정을 나눈다. 서정민(송지호)은 정숙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들킨 뒤, 전소라(조아람)에게 “우리 엄마 구박한 거 후회 안 돼?”라고 묻는다. 하지만 정숙이 정민의 어머니라고 해서, 소라가 정숙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는 없다. 소라가 정민과 결혼할 계획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설령 두 사람이 결혼을 앞뒀거나 이미 결혼한 사이였대도 마찬가지다. 소라는 자신과 정숙을 예비 며느리와 예비 시어머니 사이로 두는 대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다. 두 사람이 함께 비를 맞으며 야간 운전을 즐긴 것도, 그 덕에 정숙이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정숙과 소라의 관계가 정민이라는 매개 없이 맺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례와 승희는 또 어떤가. 인호를 중심으로 구성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하지만 인호를 지워냈을 때, 덕례와 승희는 본처 어머니와 외도 상대가 아닌 환자와 의사이자 홀로 자식을 키운 두 어머니로서 관계 맺을 수 있게 된다. 승희는 밤샘 연구 끝에 덕례의 병명을 진단해 치료한다. 덕례는 그런 승희에게 “같은 여자이자 같은 엄마”로서 “좋은 사람, 좋은 엄마가 될 기회를 저버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닥터 차정숙’ 속 여자들은 그렇게 ‘한 남자의 짝’이 아닌 각자의 경험과 소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시청자에게 다가간다.

모성애 아닌 인간적 특질로

‘닥터 차정숙’의 또 다른 미덕은 ‘전업주부 정숙’을 ‘의사 정숙’과 비교하며 폄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아와 가사는 육체적·정신적으로 강도 높은 노동이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사 남편을 둔 전업주부는 ‘남편이 번 돈으로 놀기만 하는 여자’로 여겨지곤 한다. “그 좋은 기술 놔두고 왜 집에서 살림만 하느냐”는 친구 미희(백주희)에게, 그러나 정숙은 이렇게 답한다. “나라고 뭐, 집에서 놀기만 했겠냐? 애 둘 부지런히 낳아서 키워서 사람 둘 만들어 놨어.” 드라마는 또한 어떤 환자든 헌신과 정성으로 돌보는 정숙의 태도를 이런 모성애의 연장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숙을 “5000원짜리 화분을 20년 넘은 지금까지도 안 죽이고 키우는”, 다시 말해 “한 번 맺은 인연은 동식물 막론하고 끝까지 가는” 특징적인 인물로 설명한다. 그가 고집불통 대기업 회장을 비롯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수감자, 치료를 중단한 임산부 등 여러 환자와 라포(신뢰 관계)를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알고 보니 수술 천재’ 같은 반전 없이도 차정숙이 감동을 주는 이유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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