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4 (토)

‘집착’으로 이승엽을 넘은 최정은 말한다, “내 야구는 아직 57점”이라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에스에스지 랜더스 최정(오른쪽)이 24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경기 5회초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 통산 468호 홈런을 친 뒤 추신수와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의 표현은 이랬다. “그 아이만큼 나한테 덤비는 선수는 없었다. 센 훈련 강도에 불만 없이 훈련을 이겨냈다. 보통 독한 선수가 아니었다. 핑계도 없는 아이였다. 프로 선수의 견본이자 교과서 같은 선수다.”



한때 ‘김성근의 황태자’로 불렸기 때문일까. 하지만 최정(SSG 랜더스)은 누구나 인정하는 ‘악바리’였다. 하루 1000번 땅볼을 받아냈고 2000번 방망이를 돌렸다. 김 감독은 “지바 롯데 인스트럭터(2005년) 때 이승엽(현 두산 베어스 감독)도 힘든 훈련을 견뎠지만 당시 타격 훈련만 했다. 최정은 타격 훈련에 수비 훈련까지 하루에 모두 소화해냈다”며 “그때 한계를 극복했고 그런 경험이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다”고 밝혔다.



그의 나이 이제 만 서른일곱 살. 최정은 기어이 ‘홈런왕’ 이승엽을 넘어섰다. 그는 24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2024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와 방문 경기에서 4-7로 뒤지던 5회초 상대 선발 이인복의 초구 슬라이더를 받아쳐 좌월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10호이자, 프로 20년 차를 맞은 최정의 개인 통산 468호 홈런이었다. 이승엽(통산 홈런 467개)의 이름을 밀어내고 당당히 통산 홈런 1위가 됐다. 그는 2006년부터 올해까지 19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 중이다.



아마추어 때 고교 최고 타자에게 수여되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은 최정은 2005년 프로 입단 뒤 타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홍현우(은퇴)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만 18살에 1군에서 홈런을 때려냈다. 2006년에는 방망이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한화 마무리 투수 구대성을 상대로 홈런을 만들어내 ‘소년장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해 최정은 김재현, 이승엽, 김태균에 이어 10대 나이로 두 자릿수 홈런(12개)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발군의 방망이 실력과 달리 프로 초기 그의 수비는 엉망이었다. 실책이나 악송구가 많았다. 프로 지명을 투수로 받았던 그였다. 최정은 “고등학교 시절 비공식 기록으로 구속이 시속 150㎞까지 나왔다”면서도 “투구 폼이 야수가 공을 던지는 폼이어서 투수를 했으면 아마 지금 2군에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수비 문제가 대두되면서 한때 팀 내에서 트레이드 카드로도 논의됐다. 당시 에스케이 전력분석팀에 있던 김정준 현 엘지(LG) 트윈스 수석 코치는 “최정의 경우 조범현 감독 시절 3루수, 유격수를 시키려고 했는데 수비가 도저히 안 됐다. 외야수도 안 돼 결국 1루수로 기용해야 했지만 최정은 비쩍 마른 체형이었다. 1루수로 나서려면 적어도 홈런 30개 정도는 쳐줘야 하는데 팀 내에서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고 결국 한화 투수와 트레이드 얘기가 오갔었다”고 했다.



2006년 11월 제주도 강창학야구장에서 최정은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구르고 또 굴렀다. 악착같이 일어서서 김 감독이 쳐주는 펑고(수비 훈련 때 땅볼을 굴려주는 것)를 다 받아냈다. 김 감독은 아직도 생생하게 그때를 기억한다. “한번은 노란 글러브를 끼고 있었는데 내야에서 펑고 10개를 치면 10개를 다 놓쳤다. 어쩌다 잡고 던지면 공이 1루 더그아웃 복도 쪽으로 날아갔다.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싶었다.” 그럼에도 최정은 주저앉지 않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힘든 훈련 일정을 모두 소화해냈다. “본인 스스로 믿음이 있던 것”이라고 김 감독은 말했다.



최정은 “재미있던 시절”로 당시를 돌아본다. “야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때라서 하루하루 배우는 게 재미가 있었다. 나는 성격상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 힘들더라도 그 속에서 잔재미를 찾아내는 게 내 장점이다. 수비 연습 때 이런저런 자세를 해보면서 모르는 것을 조금씩 익혀가는 재미가 있었다. 연습하다 보면 ‘어, 이러니까 되네’라는 느낌이 온다. 하지만 티배팅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이광길 전 에스케이 수비코치는 그를 “야천”(야구천재)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스스로는 “기술 습득력이 빨라서 그런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최정은 스스로도 ‘노력형 선수’라고 생각할까. 전혀 아니다. “노력은 아마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집착이 심하다.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하는 편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성형으로 가려고 노력한다. 열아홉, 스무살 때는 집착이 더 심한 편이었다. 지금 그때처럼 훈련하라면 절대 못 할 것이다.”



한때 그의 고민은 “타석에서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연습할 때처럼 실전에서도 쳐야만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날 밤 숙소에서 생각했던 바대로 타격이 안 되면 신경이 너무 쓰이”던 때도 있었다. 훈련이나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다른 선수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더그아웃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최정은 “타석에서 투수와 싸워야 하는데 어느 순간 나 자신과만 싸우고 있었다”고 돌아본다.



‘에스케이 왕조시대’ 때 최정과 함께 뛰었던 김재현 에스에스지 단장은 “최정은 성실하고 배팅에 대한 욕심도 있으며 타격 폼 연구도 꾸준히 하는 후배였다”고 돌아본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타격 폼을 응용하고 변형하면서 자신만의 타격 폼을 계속 찾아왔다”고도 했다. 한때 최정과 함께했던 트레이 힐만 전 에스케이 감독은 “최정은 힘이 워낙 좋고 타구 각도(45도 안팎) 또한 이상적이다. 내가 지금껏 본 최고의 우타자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라고도 했다. 올해 처음 한 팀에서 최정을 지켜보고 있는 이숭용 에스에스지 감독은 “스프링캠프 때 최정을 처음 봤는데 놀랐다. 캠프 시작부터 100%로 훈련을 소화하는 대단한 선수였다”면서 “내가 본 것 보다 더 좋은 선수였고 같은 선수 출신으로서 리스펙한다. 이렇게 준비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할 수 있구나 깨달았다. 쉬어도 된다고 하는데 단 한 번도 훈련을 빠지지 않는 성실한 선수”라고 했다.



사실 어릴 적 축구를 좋아했던 최정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야구장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린스카우트로 야구장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딱 한 번 갔는데 “그라운드 위 선수들이 개미처럼 보이고 야구 경기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잡고 치고 던지는 게 재밌어서” 야구에 빠진 뒤로는 무섭게 빠져들었다. 일견 순해 보이지만 승부욕만큼은 타고났다. 현역이면서도 통산 몸에맞는공 1위에 올라 있는 이유다.



고단했던 스무살을 견디고 그는 기어이 ‘홈런 공장장’(문학구장은 홈런이 많이 나와서 ‘홈런 공장’으로 불린다)이 됐다. 스스로는 “집착”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의 ‘집착’은 반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한 끈기였고, 절대 포기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신념이었으며, ‘야구 장인’(김성근 감독)조차 혀를 내두르게 한 열정이었다.



서른 살 때 최정은 말했었다. “은퇴할 때까지 목표는 단 하나다. 안 다치고 1년, 1년을 버티는 것, 그래서 한때는 0점이었던 지금의 50점짜리 야구를 10년 뒤에는 100점짜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통산 최다 홈런을 넘어선 서른일곱 살의 최정은 말한다. “항상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성장하려고 하고 있다. 서른 살 때 50점을 줬으니까 1년에 1점씩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7년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나 자신한테 57점을 주고 싶다.” 그만의 속도로 뚜벅뚜벅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가고 있는 ‘홈런왕’ 최정이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