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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참을 수 없는 목소리의 가벼움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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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람 대신 말하는 기계가 앉아 있는 캠핑의자. 사진 전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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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대전역 광장에서 택시를 타러 가는 길에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캠핑의자에 작은 스피커가 놓여 있고 녹음 메시지가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주인 없는 의자, 아니 사람 대신 말하는 기계가 앉아 있는 캠핑의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고 잘못됐다는 생각을 참기 어려웠다. 신앙과 전도의 역사에서 지켜오던 어떤 선을 넘은 장면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녹음해서 스피커로 반복 재생하는 목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메밀묵이나 찹쌀떡을 사라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트럭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정겹기까지 하다. 더구나 메밀묵 장수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 돈을 들고 찾아올 손님을 언제라도 반갑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반면 청자에게 ‘회개’와 ‘구원’이라는 실존적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교인은 그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스피커를 틀어두고 자리를 비웠다. 메시지의 무게에 비해 캠핑의자 위 홀로 놓인 스피커는 너무 가벼워 보였다.



평소에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쓴 어깨띠를 두른 교인들이 피곤한 목소리로 회개와 구원을 말하곤 했다. 그들 옆을 지날 때면 그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설 행인이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적어도 자신의 깊은 신앙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려니 싶었다. 이들은 육성으로 외치지 않을 때는 휴대용 스피커를 의자에 놓고 녹음된 메시지를 재생하기도 했다. 이른바 진정성이 다소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덥거나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신앙을 전파하려는 의지만큼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캠핑의자에 스피커만 두고 사라진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연 이들은 절실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캠핑의자와 스피커를 쳐다보면서 나는 메밀묵 트럭을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챗지피티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에 이르렀다. 몸이 없는 상태로 끝도 없이 메시지를 뱉어내는 존재, 자리를 비운 채로, 아니 애초에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서 무거운 주제를 건성으로 말하는 것 같은 존재에 내가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광장의 더위도 추위도 먼지도 겪지 않는 스피커가 외치는 복음처럼, 아무리 그럴듯하고 옳은 말이라고 해도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메시지를 내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학기에 하는 ‘인공지능과 로봇 정책’ 대학원 수업에서 챗지피티를 사용해서 글쓰기 과제를 하는 실험이 대체로 실패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각자의 해석과 의견을 적어야 하는 과제를 몸도 없고 입장도 없는 인공지능에 맡겨서 해보라는 나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캠핑의자와 스피커가 아니라 성서 속 예언자의 형상을 한 로봇이나 홀로그램이 광장에 서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면 달랐을까. 몸이 없고 자리가 없는 말에 가짜 몸을 붙여 자리를 잡게 했다면 나는 그 메시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그건 지난 대선 때 유세 차량에 달린 스피커 대신 ‘에이아이 윤석열’이나 ‘명탐정 이재봇’이 스크린에 등장해서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시도일 것이다. 국가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엄중한 메시지를 더위도 추위도 먼지도 없는 가상공간에서 뱉어내던 인공지능 정치인은 결국 대전역 광장의 캠핑의자 위 스피커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상인, 종교인, 정치인 모두 남을 설득하기 위해 끝없이 말을 뱉어내는 사람들이다. 학자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들의 말은 그 말을 내뱉는 몸, 그 몸이 놓인 자리와 분리되기 어렵다. 캠핑의자와 스피커에, 인공지능과 로봇에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전가하고 자리를 비운 사람의 말을 굳이 믿고 따를 필요가 있을까. 특히 그 말이 회개, 구원, 심판, 자유처럼 거창한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면 우리는 몸이 없는 말, 자리가 없는 말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대전역 광장의 캠핑의자 앞에서 말과 몸, 말과 자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잠시 심각하고 민망했다. 그러다 문득 주님의 대리인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추론에 도달했고, 나는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려 택시 승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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