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중 한국일보 기자가 묵은 중국 베이징의 홀리데이 인 베이징 창안 웨스트 전경. 최동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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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 하계올림픽과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치러진 유례없는 올림픽이다. 기자는 운이 좋게도(?) 6개월을 사이에 두고 열린 이 두 대회를 모두 취재할 수 있었다.
동경(東京)과 북경(北京).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비슷한 시기와 상황에 치러진 두 대회는 놀랍도록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본은 유치 때와 많이 달라진 전염병 상황에 '울며 겨자 먹기'로 대회를 치렀다. 올림픽 유치를 최고 공적으로 내세웠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개·폐막식 모두에서 뒤로 숨었다. 그 후임 스가 요시히데 당시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내세운 버블 방역은 부도를 막고 어떻게든 개막을 강행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첫날부터 구멍이 숭숭 났다. 미디어 호텔을 지키는 건 밤잠이 많은 노인뿐이었다. 기자가 묵었던 신주쿠의 경우, 올림픽 AD카드와 올림픽 가방을 메고 다녀도 주점에서 나온 흑인 '삐끼'들이 들러붙어 애를 먹었다.
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회를 완벽히 치러내는 모습을 '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베이징의 모든 곳을 2.5m 이상의 펜스로 둘렀다. 펜스 안팎은 공안이 24시간 감시했다. 왕래는 물론 배달도 통제됐다. 어쩌면 중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역이었다.
밤 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버이츠'로 신주쿠 맛집을 검색, 초밥과 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건 도쿄 대회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베이징 대회는 이런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경기는 밤 11시에 끝났지만 호텔 식당은 밤 10시, 메인미디어센터(MMC) 식당은 밤 11시에 닫았다.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도착하면 룸서비스를 시켜야 했다. 각 109위안(약 2만1,000원)인 스파게티나 햄달걀볶음밥은 매우 맛이 없었다. 캔맥주를 함께 시키면 59위안(약 1만1,100원)이 추가됐다. 폐쇄 루프에 있는 3주 동안 약 4㎏이 빠졌다.
자원봉사자들의 모습도 퍽 대조적이었다. 올림픽 반대 여론으로 도쿄 대회 자원봉사자 자리는 인기가 없었다. 자원봉사자도 기근이었다. 그래서 남은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올림픽 덕후' 수준의 열정을 보여줬다. 사교성은 좋았지만 영어가 부족했다. 위치를 안내하는 자원봉사자가 'turn right'(오른쪽으로) 수준의 영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베이징 대회의 자원봉사자는 2만 명 선발에 약 100만 명이 몰리며 5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대부분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로 영어가 유창했고, 면접을 거친 듯 모두 친절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수당은 없지만 나중에 직장을 얻는 데 좋은 경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의 입주 빌딩 주변에서 18일 시위대가 모여 올림픽 개최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도쿄EPA=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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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의 모습도 사뭇 달랐다. 도쿄 대회는 마지막까지 올림픽 찬성과 반대가 상존했다. 시위대는 마지막 날까지 경기장을 찾았다. 폐막식날 시위대는 도쿄올림픽스타디움 건너편 도로를 행진했다.
20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입장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베이징=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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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회는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폐쇄루프 때문에 거리에 직접 나가 볼 순 없었지만, 창밖으로 본 거리에는 오륜기를 기념 촬영하는 시민들이 꽤 있었다. 마스코트 빙둔둔 품귀 현상은 올림픽의 인기를 간접적으로 전해줬다. 시진핑 주석은 개막식에 이어 폐막식에서도 메인 이벤트처럼 등장했다. 출연자들과 선택받은 일부 중국 관중들은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베이징 대회는 오미크론 감염률 0.01%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방역에 성공했다. 하지만 축제로 기억될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사람 사이 혐오 바이러스는 방역이 되지 못했다. 베이징 대회는 시작부터 미국 등 서방 사회의 환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초기 편파 판정 논란으로 국내 반중 감정도 심해졌다. 기사 댓글에는 항상 혐중의 말들이 달렸다.
그래도 주변의 사람들은 항상 친절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정신없는 사이 잃어버린 값비싼 녹음기를 찾아줬다. 바닥에 앉아 기사를 쓸 땐 자기 의자를 내주기도 했다. 올림픽 기간 얼굴을 마주한 중국 사람들과 기사 속 '중국' 사이의 간극은 아쉽게도 마지막 날까지 메워지지 못했다.
베이징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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